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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모른다 그 먼 길을, 모르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 내게서 떠나간 모든 이별과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몸을 나는 모른다 피고 지는 것들의 그 끝없는 소모를 비바람 눈보라 빗금을 뚫고 건너가던 한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태양을 끌고 가는 개미의 시간과 네게로만 몰려가는 피의 까닭 ..
사소한 시인 전태화와 장명화의 아들인 전윤호는 시를 쓴다 안현숙의 남편이고 전용걸과 전홍걸의 아버지인 전윤호는 시인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노무현이 자살한 시대 일본에서는 방사능이 새어 나오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자유를 외칠 때 전윤호는 방구석에 앉아서 시를 쓴다 ..
서른아홉 사십이 되면 더 이상 투덜대지 않겠다 이제 세상 엉망인 이유에 내 책임도 있으니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무조건 미안하다 아침이면 목 잘리는 꿈을 깨고 멍하니 생각한다 누가 나를 고발했을까 더 나빠지기 전에 거사 한 번 해보자던 일당들은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아 하루 세 ..
신문보는 남자 위성도시로 가는 전철에서 손잡이에 매달려 내일자 조간을 읽는 남자 반을 접어도 옆사람과 부딪치는 정치면을 ... 두 번 읽는 남자 아파트 분양공고 위에 땀방울을 떨구는 남자 최고 발행부수의 권위를 신뢰하고 독설이 강한 사설에 이마가 조금씩 벗겨지는 남자 선거 때..
하프타임 중환자실에서 수액 주사를 맞으며 혈압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열이 높더니 축구장에 와 있다 갑자기 쓰러진 전반은 엉망이었다 공격은 패스가 안 되고 수비는 실수투성이 스트레스가 주원인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운이 좋은 겁니다 그나마 버티는 건 온몸으로 막아준 골키퍼 ..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이삿짐을 싸는 데 익숙해진 그녀는 내가 없어도 쉽게 떠날 준비를 끝낸다 내 몫으로 남겨진 가구나 이불들은 너무 낡거나 무거워서 버리고 가도 괜찮은 것들이다 필요하다면 가볍게 그녀는 기르던 개도 이웃에 준다 함께 산 지난 오 년 동안 기른 머리를 ..
수몰 지구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
강변 살고 장석남 사람들은 모두 강에 가 흘렀다오래 묵은 상식과 집과 골목을 버리고가장 깊은 하루를 흘렀다강변엔 낮달이 걸리고산 너머 소인이 찍힌 바람이속속 도착하였다 뿌리가순결한 나무들이 강심으로 허리를 던지고자궁을 연 산그림자 사이로사람들은 굽이굽이 물소리를 풀었다 간혹피묻은 뉴스들이 자갈처럼 가라앉고 물방울들이 중얼거리며 떠올랐다모래언덕이 쌀쌀한 햇빛 아래물은 흘러서 어디에 닿는지 의심치 않고물소리가 가끔 강 밖으로 나가면 풀잎들은마른 귀를 적셨다강변 사는 날 저녁은 귀에삘기꽃이 자욱했다 ---------------------------------- 송학동 1 장석남 계단만으로도 한동네가 되다니 무릎만 남은 삶의계단 끝마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위태롭게뱃고동들을 받아먹고 있다 저 아래는 어디일까 뱃..
편자 신은 연애 장석남 겨울 나무여 내 발등을 한번 짛어볼래? 달빛아내 광대뼈을 한번 후려쳐볼래? 흐르다 멈춰버린 얼음장아 내 손톱을 한번 뽑아볼래?사랑아 낮에 켜진 가로등을 찾아내볼래? 기어코? 저녁이 되자 길가의 소나무들이 어두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조상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 어쨌다는 거야? 하고 묻노라면 재빨리 이번엔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해주었다던 여인 이야기를 금방 돋는 별빛들도 좀 섞어 말한다 말한다 여전히 어두운 이야기지만 말한다.... 잊을 만하면 으르렁 으르렁대는 한밤의 보일러 소리 -----------------------------------------------편자를 신은 당나귀가 아닌 사랑이면 얼마나 불편할까. 편자는 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일을 시키기 위해 덧씌운 신발 같..
三월이 오고 장석남 3월이 오고 또저녁이 오네열두 겹으로 사랑이 오네물 이랑이 밀고 오는 것,물 이랑이 이 강안을 밀어서 내 앉은 자리를 밀어서 나를 제 어깨에 초록으로 앉히고는 밀어서 가는데불이 한 점이 켜지고 또 꺼지고목련이 정수리에서부터 피어 내려오는데처음의 서늘한 입맞춤이 조금씩더워지고 더워지고3월이 오고 꽃밭마다꽃이 와 앉고잎이 솟고 솟고열두 겹 사랑이 오네조금 더 작아져서 살아갈 일을우리는 이마에 물들이네초록 이마로 물들이네 ------------------------------------겨울 지나 봄이 막 가져오는 것들은 꽃이고 생명이고 사랑이다. 흔한 비유이다. 중요한 건 그 흔한 얘기를 거창하게 했다면 아마도 뭐 그렇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라, 흔들리지 않는 듯, 희미한 햇볕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