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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운명이다 애막골 근처 오월의 논길을 걸으면 온통 개구리 울음이다 울음뿐인 골짜기를 지나면 은하수 가득 벼들의 눈물도 흐르고 눈물에 젖고 나면 별들은 일시에 무너져 내려 몸을 헤집고 살 부비는 종소리 깊게 퍼져나가고 누가 당신에게 울음을 옮겨놓았나 손바닥으로 별을 쓸어보는 밤이다 은하수엔 숭어 떼 뛰고 함부로 던진 훌치기바늘은 등허리를 헤집고 질끈 눈 감은 울음은 논바닥에 나뒹구는 밤이고 어차피 혼자인 밤이고 소쩍새 나는 밤인데 한승태 시집 _사소한 구원_ 중에서
유모차 한승태 아가만 필요한 건 아니다 할머니가 끌고 온 계절도 허리를 펴고 싶겠다 핏줄이 당기듯 처음으로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회귀의 자세란 저런 것인가 내세엔 무얼 바라야 고단하지 않을까 저녁이 둥글도록 끌고 온 이 겨울 끝자락 새싹도 온몸을 둥글게 말아야 태어난다..
제비꽃 한승태 다시 돌아왔다, 무덤가 제비꽃 겨우내 그 미련함만 뽑아내기로 한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 참 송구하다 결국은 내가 속고 마는 경지가 아니고서야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봄 뽑아낸 자리마다 미련은 피고 또 핀다 시집<바람분교> 중에서
탑골 공원 한승태 근대가 남긴 최초의 고아라지 파고다 공원이 들어서고도 백년쯤 日光이 만세 하듯 급하게 지구를 돌리고 맥고모자에 양복이 낯설었던 팔각정 울분도 볕도 간데없고 햇살만 남아 거대한 유리관 속 원각사 탑 주인 잃은 종처럼 넋 놓고 서서 아름다운 기와집이 있고 옥신(..
와우(蝸牛) 한승태 일 만년의 시간을 끌고 나와 충분히 미련할 줄 알고 대지의 연한 입술만 더듬는 그를 때를 기다려 밭가는 맨발의 황소 라고 부르자, 농경민족의 기억 속에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햇살가시나무처럼 바람의 워낭소리 낭자하고 온통 무료의 양식으로만 자라는 이파리 뒤에 ..
금낭화 한승태 유월 한낮 어린 딸을 데리고 옛 마을의 山寺로 산책 간다 경내 스피커에선 목탁소리 대신 녹음한 부처 말씀만 또랑또랑 흘러나오고 사천왕 대신 개 두 마리 배 내놓고 낮잠 잔다 햇살은 화엄경 마냥 저리 넓어서 설법 위로 떠도는 자벌레가 무량한 햇살의 반죽을 펴놓고 주..
노랑나비 한승태 나비에게 소원을 빌면 말하지 못하는 나비는 비밀을 간직한 채 하늘로 간다 대한민국이라는 배에 탔던 사람들은 맹골수도 어두운 바다 속에서 이국만리 독립 투쟁의 장정에서 힘없는 국가에 태어나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혹은 먼저 떠난 부모와 형제자매를 찾아 이승의 ..
시인이여, 너의 얼굴에 침을 뱉어라! 한승태 최근 여성 시인, 작가들의 고백 및 작품 발표로 문학계가 낯부끄러운 이전투구의 장 같다. 그러나 진즉에 터졌어야 할 일들이다. 우리가 사는 당대는 바뀌고 있다. 변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도 만만치 않다. 첨단을 달린다는 글 쓰는 집단에도 예외가 아니다. 나부터도 그렇다. 고백하자면 나의 글도 여자에게 마음을 얻기 위한 제스처였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세계관이 있었겠는가. 그런 거 없었다. 대학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에게도 참 많은 누를 끼치고도 독설을 퍼붓고, 어찌어찌해보려고 했다. 인정한다. 마치 그것이 문학하는 자의 특권인양,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그런 선배들을 부러워했으면서도 욕했다. 그러면서 선배가 되어서는 나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