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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쉰 조현석 1 배낭 꾸렸다 되도록 아주 가볍게 걸을수록 거듭거듭 산비탈만 나타났다 마음이 불편하면 몸이 알아서 미끄러지고 몸이 불편하면 마음이 알아서 미끄러져주고 허구한 날 늘 미끄러졌던 기억들, 이젠 정겹다 2 어스름 속에 산 아래 불빛 어느 것이든 따뜻하지 않을까 핑! 눈물이..
저녁강 함순례 살이 그리워 네 말을 들은 듯 살구가 떨어졌다 살구나무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툭 떨어지는 향기 살고 싶어 싸웠는데 죽지 못해 갈라섰는데 문득 그런 때가 있다고 전화기 너머 가라앉는 목소리가 강물을 적신다 너의 강가에 앉은 나도 억새 물결이다 지금 여기에 없..
키친 가든 함성호 네 자 다섯 자의 조그만 정원 단풍나무와 콩배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고 낮은 담을 둘러 아침 햇살을 들여놓은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자라는 키친 가든에서 오이를 다듬고, 팬을 달구고 데치고, 간을 맞추고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는 키친 가든에서 아욱이 자라고 대파가 통통해지고 감자에 싹이나고 부추가 삐죽해질 동안 딸기가 익어가는 동안 콩과 시금치가 맛이 드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끓는 소리, 찧는 소리, 씻는 소리 스-윽 베는 소리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이윽고 우리가 심은 씨앗들이, 모르는 동안이, 샐러드가 되고, 파강회가 되고, 수프가 되고, 무침이 되었을 때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말했다 "누구와, 가 아닌 음식은 쓰레기지" 감자와 딸기와 부추..
도미노 놀이 이병철 공사장에서 우리는 무슨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개들이 짝짓기 하는 냄새야 아니야 날지 못하는 새의 똥 냄새야 죽은 사람 냄새야, 시멘트 먼지 속으로 우리는 코를 킁킁거렸다 죽은 사람 냄새는 슬프다 슬픈 게 뭔지 어떻게 알아? 그건 아직 배우지 않았잖아 철근 위로 ..
현기증 너는 내 접시에 조개를 건네주었다 미처 해감하지 못한 흙이 씹혔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왜 하필 너는 이런 걸 언젠가 너와 나는 낯선 곳을 찾아 무작정 걸었다 어딘가에 닿으면 우리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는 바다로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실패한 ..
농협장례식장 최금진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은 농협장례식장 밭 갈다 죽은 사람, 감자 심다 죽은 사람 모두 녹슨 호미 같은 손 내려놓고 다급히 이곳으로 온다 마을에서 제일 깨끗하고 제일 따뜻하고 시원한 곳 작은 소로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 데서나 바다를 만나 듯 농약치고 풀 뽑고 거..
페이스북 친구인 이만교 작가의 글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이 정도야 아는 이야기지만 읽고 나면 아프다. 아픈데 또 읽게 된다. 이런 게 문학의 언어다. "대화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니 하는 말인데, 대기업이 고객을 상대하는 대화 방식은 참 재밌다. 나는 결코 대기업 책임자는커녕 ..
육림랜드 한승태 한 때 육림育林의 날이 있어 이 공원을 위한 날로 알았다 육림연탄에 육림극장을 거느린 지방 소도시 꼬맹이였느니 그럴 만도 했겠다 공원 안에는 팔각정이 있고 한 때는 거기서 결혼하는 것으로 삼촌은 품위를 보장받았다 내게는 대회전차니 바이킹보다 곰과 호랑이가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