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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올가미 칠월 정원에 조롱박이 열리는 집 아궁이에 불을 넣은 주인이 올가미를 만든다 빈 그릇으로 톡톡 바닥을 두드려도 누렁이는 개집 안에 돌부처처럼 앉아 나오지 않았다 헛소리를 내던 주인은 금세 거칠어졌다 (범인이 인질극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집행은 수돗가에서 이루어졌다 처마에 밧줄을 걸자 뒷다리로 버티던 어떤 안간힘이 공중으로 들렸다 목메달린 개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래서 모가지를 딴다 수돗가에 달린 그 조롱박이 뒤척일 때마다 말간 하늘이 개밥그릇처럼 덜그럭거렸다 얼굴이 생긴 올가미 하나 질기게 흔들리고 있었다 애써 눈길을 돌렸으나 다 보였다, 어쩌면 그날 내게 죽음을 보는 곁눈이 생겼는지 모른다 공중에서 서서 내려다보던 곁눈이 감기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성스럽게 털을 닦아내자 누렁이는 반들..
睡眠寺 전윤호 초파일 아침 절에 가자던 아내가 자고 있다 다른 식구들도 일 년에 한 번은 가야 한다고 다그치던 아내가 자고 있다 엄마 깨워야지? 아이가 묻는다 아니 그냥 자게 하자 매일 출근하는 아내에게 오늘 하루 늦잠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랴 나는 베개와 이불을 다독거려 아내의 잠을 고인다 고른 숨결로 깊은 잠에 빠진 적멸보궁 초파일 아침 나는 안방에 법당을 세우고 연등 같은 아이들과 꿈꾸는 설법을 듣는다 가장 아름다운 절을 찾으라면 불법과 해탈에 관계없이 이 절이라 생각한다.
못난이 감자 전윤호 아들이 어릴 때 엄마 상 차리는 거 돕는다고 수저를 놓곤 했다 젓가락이 어려워 가끔 머리가 반대로 놓이기도 했다 잘못 놓은 젓가락 한 벌처럼 아내는 나와 반대로 잔다 내가 코를 골기 때문이다 코앞의 맨발은 못생긴 감자 같다 엄지는 너무 크고 새끼발가락은 뒤틀렸다 이십 리 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다더니 일하느라 지금도 매일 걷는다 내일을 위해 거꾸로 잠든 아내를 바로잡을 수 없다 그저 내 감자가 얼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주는 수밖에 주차장에서 취객이 차를 걷어찼는지 경보기 소리가 오래 울었다 산문집_내겐 아내가 있다 중에서 왜 울었는지 물어보지 못할 질문이 있다. 바로 이런 경우다
한없이 투명한 그러니까 어느 날부터였는지 나는 한없이 투명해졌나보다 딸은 일찍 들어온 나를 보고 더 이상 놀라지 않고 집에 들어온 내게 아내는 말을 걸지 않는다 딸과 아내는 내 앞에서 지난 얘기처럼 내 얘기를 하고 말을 걸어도 돌아보거나 대답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 거다 내가 한 약속처럼 딸과 아내의 다정한 대화를 들어보면 내 얘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참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한때 불 켜지면 숨는 바퀴벌레처럼 이제 더 이상 숨지 않는다 이봐, 밥 줘야지! 집달리가 집안의 가재도구를 빼앗아가듯 내가 아끼던 시계도 사라졌다 내 양말 어디 있어? 답이 없다 냄새도 없다 한없이 투명하다 한승태 시집 중에서 세상에는 이런 아버지들이 너무 많다. 나도 그 중 하나다.
일신상의 비밀 전윤호 또 겨드랑이가 가렵다 침울한 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긁어보지만 참을 수 없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숙연한 영업실적 보고회의 감원을 해야 한다고 사장은 딱딱거리는데 문제는 내 겨드랑이다 삐죽 날개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옷을 벗을 때마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아내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개는 점점 자란다 조심해야 한다 내눈은 점점 위로 사무실 천장을 뚫고 옥상 위로 저 아래에서 날 부르는 날카로운 소리 하지만 난 맷돌에 눌려 죽은 아기처럼 자꾸 겨드랑이가 가렵다 전윤호 산문집_내겐 아내가 있다 중에서 압권이다. 이 시대 직장인의 소망이나 삶의 상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다. 한 번만 읽으며 뭔 얘기인지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는 쉬운 시다. 쉽다고 그 ..
짐승의 안쪽 박지웅 어수룩한 개는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쥐약과 건넛산에 놓인 달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빛나는 달이 뒤뜰로 떨어지면 빛처럼 달려갔다 키우던 개와 닭은 주로 화단에 묻혔다가 이듬해 유월 머리가 여럿 달린 수국이 되었다 둥그스레한 수국 머리를 쓰다듬으면 묶인 새끼들이 먼저 알아보고 낑낑댔다 한동안 흙과 물과 바람과 섞여 백수국은 낯가림 없이 옛집 마당을 지켰다 닭이 다 자라면 날개를 꺾어 안고 시장에 갔다 닭장수는 모가지를 젖혀 칼질만 스윽 냈다 닭이 던져진 고무통 속에서 둥둥 북소리가 났다 피가 다 빠진 뒤에야 잠잠해지는 짐승의 안쪽 잠자리에 들 때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핏발선 꽃들, 힘세고 오래가던 어지럼들 닭 뼈다귀를 화단에 던져주면 수국은 혈육처럼 그러안고 밤새 핥는 것이었다 ..
오래된 정원 전윤호 아버지 집에는 라일락 나무가 있었네 지금은 사라진 마당에 봄이면 향기가 먼저 오고 문을 열면 꽃이 피었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연탄불이 꺼진 방 조퇴하고 누워 있으면 나뭇가지가 이마를 짚어주었네 나와 자던 고양이가 올라가던 나무 그 앞에 서면 우주가 나를 반겼네 아버지 집에는 엄마가 없었네 라일락 나무가 내 방 앞을 지켰네 봄이면 아직도 열이 오르고 몸살을 앓는데 아버지 집은 내 안에 있어 기침할 때마다 라알락 향기가 올라온다네 전윤호 시집 중에서 오래된 정원은 우주의 정원이고 내 안의 정원이고 어머니의 품이다. 그 정원에는 우주나무, 즉 어머니 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라일락이다. 문제는 그 정원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고, 그 집에는 어머니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 없는 집은 집..
나는 노새다 _한승태 상상의 동물이 아니다 노새는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난 튀기다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나온 새끼는 버새다 노새와 버새는 새끼를 낳지 못하는 불구다 크기는 말만하나 생김새는 당나귀를 닮았다 한때 노동 세계에서 힘깨나 쓰는 것으로 인기였다 몸은 튼튼하고 아무거나 잘 먹고 변덕 심한 주인도 잘 견디어 정신병에 걸리는 일도 없다 말없이 무거운 짐과 외로운 길도 능히 견딘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다
삶, 삶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 나는 예감을 믿지 않는다. 전조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비방도 원한도 피하지 않는다. 세상에 죽음이란 없으니까. 아무도 죽지 않는다, 아무 것도 죽지 않는다. 열일곱 살에도 일흔 살에도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세상엔 삶과 빛만이 존재할 뿐, 죽음도 어둠도 없다. 우리는 모두 지금 해변가에 있다. 마침내 불멸이 무리지어 몰려올 때 나는 그물을 걷는 한 사람. 집에서 살면 집이 무너지진 않으리. 나는 백년 중 아무 시간이나 불러 거기로 가서 집을 지으리라. 이것이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의 아내들이 나와 함께 한 식탁에 앉아있는 이유. 이 식탁은 할아버지에게나 손자에게나 같다. 미래는 현재에 이루어지는 법, 내가 손을 들어올리면 모든 다섯 개의 빛이 당신 곁에 머물리라. ..
5월 23일 박용하 그가 가고 난 자리에 뒤가 남았는데 그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죽임이어서 남아 있는 자를 못 견디게 한다. 그가 삶이었을 때 밥값 술값 내는 인생 선배나 어깨를 내주며 노래를 불러 젖히는 동무쯤으로 생각했다. 강자한테 대들고 약자한테 함부로 안 하는 사람이어서 팬이 됐다.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세상에서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 얘기야 없는 게 아니지만 뒤 같은 거 쳐다보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그가 떠난 뒤를 더 돌아보게 된다. 내가 놀던 자리, 내가 머물던 자리는 어떠했던가. 앞으로 나서지 못해 뒤에서 숨죽인 날들의 기억 속에서 하염없이 뒤를 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절벽을 붙잡는 심정으로 뒤를 잡아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맨땅에 헤딩해 권력을 쥐었다. 그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