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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생활세계에서 춘천가기 이장욱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진리와 형이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초중등학교 때는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웠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는데 또 독재자를 뽑았구나. 춘천에는 호수가 있고 산이 있고 깨끗한 길이 있지. 여..
유모차 한승태 아가만 필요한 건 아니다 할머니가 끌고 온 계절도 허리를 펴고 싶겠다 핏줄이 당기듯 처음으로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회귀의 자세란 저런 것인가 내세엔 무얼 바라야 고단하지 않을까 저녁이 둥글도록 끌고 온 이 겨울 끝자락 새싹도 온몸을 둥글게 말아야 태어난다..
제비꽃 한승태 다시 돌아왔다, 무덤가 제비꽃 겨우내 그 미련함만 뽑아내기로 한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 참 송구하다 결국은 내가 속고 마는 경지가 아니고서야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봄 뽑아낸 자리마다 미련은 피고 또 핀다 시집<바람분교> 중에서
탑골 공원 한승태 근대가 남긴 최초의 고아라지 파고다 공원이 들어서고도 백년쯤 日光이 만세 하듯 급하게 지구를 돌리고 맥고모자에 양복이 낯설었던 팔각정 울분도 볕도 간데없고 햇살만 남아 거대한 유리관 속 원각사 탑 주인 잃은 종처럼 넋 놓고 서서 아름다운 기와집이 있고 옥신(..
와우(蝸牛) 한승태 일 만년의 시간을 끌고 나와 충분히 미련할 줄 알고 대지의 연한 입술만 더듬는 그를 때를 기다려 밭가는 맨발의 황소 라고 부르자, 농경민족의 기억 속에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햇살가시나무처럼 바람의 워낭소리 낭자하고 온통 무료의 양식으로만 자라는 이파리 뒤에 ..
금낭화 한승태 유월 한낮 어린 딸을 데리고 옛 마을의 山寺로 산책 간다 경내 스피커에선 목탁소리 대신 녹음한 부처 말씀만 또랑또랑 흘러나오고 사천왕 대신 개 두 마리 배 내놓고 낮잠 잔다 햇살은 화엄경 마냥 저리 넓어서 설법 위로 떠도는 자벌레가 무량한 햇살의 반죽을 펴놓고 주..
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
들판의 트레일러 / 김개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나는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들판을 가지게 되겠지 풀이 마르는 냄새가 옷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스밀 거야 당신과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냄새야 당신은 트레일러에서 빛을 끄고 녹슬어가다 하루에 한 번씩 새로운 연장으로 태어날 거야 당신은 끽끽거리는 트레일러를 흔들며 요리를 하고 고장난 줄도 모르는 나를 오전 내내 수리해 나는 차돌 같은 당신의 희고 큰 치아 밑에서 펴지고 잘라지고 조여지면서 점점 쓸모 있어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독초와 뱀과 바위가 많았으면 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좋아 그런 곳일수록 진귀한 풀과 나무와 꽃이 가득하니까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 좋아..
산책 돌아와서 보니 사람이 있다. 어디서 본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 있고 움직이다가 안 움직이기도 하니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물 한잔 드려요. 물어본다. 꺾어온 장미를 화병에 꽂으며 아까 소릴 들었죠. 문이 쾅하고 닫혀서 깜짝 놀랐잖아요. 뒤돌아보면 사람이 있고 바람이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