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5)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언덕 언덕파란 눈썹과 같은 언덕 나는 언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무엇이든 그 언덕을 넘어서 왔거든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 나였으니까 그 한 사람을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지그리하여 한번도 부르지 못하고 나는 그 언덕의 노래였으면 했지주인이 없거든 노래는 갇히지 않지그 언덕과 같지 노을 속에서멀리 사랑이 보이지 붉게 타는 노을사랑이 보이는 그 긴 언덕을 나는 사랑하지 나는 그 언덕을 넘어서 가지누구든 언덕을 넘어서 갔거든하늘 보며 작아지며 넘어갔거든나는 보이지 않지 그대로언덕이거나적막이거나 나는 언덕을 넘어오는 한 사람으로부터만나였으니까 장석남 시집 10p~11p중에서 언덕 너머를 꿈꾸는 사람은 낭만주의자다. 이 시는 언덕을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언덕에 머물러 있다. 너머..
나를 위한 기다림 지금 영화관에 앉아 있다나는 내 인생의 관람객3등석 C열에 앉아서 꿈과 인생이 모호하게 뒤섞이는 영화를 보노라면저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도나의 근원을 알 수 없다약간 우울했지만 꾹 참으면서 영화관 앞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오래 기다린다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나는 희망을 내려놓고 기다린다언제 또 이렇게 이유없이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 누군가를기다려볼 날이 있겠어버스가 도착하고 낯선 사람들이 내리고다시 버스에 올라 떠나가는 사람들나를 위한 이 막연한 기다림!나는 누구의 대역이던가 박세현 시집 중에서 1953년생,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상주작가로 있는 박세현 시인의 시를 읽고 있다. 예술영화관 아트스페이스의 중독자이며 거리탐색자이며 빗소리듣기모임의 준회원이고 ..
북향 방 봄부터 북향 방에서 살았다처음엔 외출할 때마다 놀랐다이렇게 밝은 날이었구나겨울까지 익혀왔다이 방에서 지내는 법을북향 창 블라인드를 오히려 내리고책상 위 스탠드만 켠다차츰 동공이 열리면 눈이 부시다약간의 광선에도눈이 내렸는지 알지 못한다햇빛이 돌아왔는지 끝내잿빛인 채 저물었는지어둠에 단어들이 녹지 않게조금씩 사전을 읽는다투명한 잉크로 일기를 쓰면 책상에 스며들지 않는다날씨는 기록하지 않는다밝은 방에서 사는 일은 어땠던가기억나지 않고돌아갈 마음도 없다북향의 사람이 되었으니까빛이 변하지 않는 한강, 계간지 ‘문학과사회’(147호, 2024년 가을)에서북쪽이기에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것이 있다. 이 시도 그렇다. 우리가 아는 북쪽은 무엇인가? 서로서로가 짐작하는 북쪽을 만져본다. (한승태)
숨을 껴안다 오늘은 흉곽이 아파내 숨을 내가 가만히 껴안고 있다가늘고 부드러운 숨을 골라흉곽으로 넣어 주고 있다 흉왠지 흉본 일이나들었던 일들이흉곽 속에는 웅크리고 들어 있을 것 같아보듬듯 타이르듯 안고 있다 내 숨을 껴안고 있다 보면숨이란 참 아픈 것들이었구나따끔거리는 것으로 보아삼각형이나 가시 모양 혹은깨진 사금파리 모양이겠구나 생각한다 남을 흉본 흉과내 귀에 닿지 않은 흉을어쩌면 들숨으로 불러들이는지도 모르겠다그리도 등이 아니라앞쪽이 아파서 다행이라며껴안아도 아픈비밀스러운 숨을 천천히 내쉰다 이서화 시집 파란, 2024 이젠 눈도 어둡고 몸도 말을 듣지 않고 얼굴은 사뭇 긁힌 흔적이 많아 둥글어졌겠다 싶은데, 사람들 눈에는 아직 모서리라 한다. 젊어서는 황지우 시처럼 재치 있는 시에 눈이 ..
윤동주 무덤 앞에서 정 호 승 이제는 조국이 울어야 할 때다어제는 조국을 위하여한 시인이 눈물을 흘렸으므로이제는 한 시인을 위하여조국의 마른 잎새들이 울어야 할 때다이제는 조국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어제는 조국을 위하여한 시인이 목숨을 버렸으므로이제는 한 젊은 시인을 위하여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죽어서 사는 길을 홀로 걸어간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사나이무덤조차 한 점 부끄럼 없는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나이오늘도 북간도 찬 바람곁에 서걱이다가잠시 마른 풀잎으로 누웠다 일어나느니저 푸른 겨울하늘 아래한 송이 무덤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을 위하여한 줄기 해란강은 말없이 흐른다 시인의 길이 이토록 무섭고 아득하다조국이 한 명 한 명 개인을 위해울어줄 날이 있을까?무엇을 바..
처용의 아내 당신 앞에 합장하면서도 차별하는 마음이 나는 좋아요 오로지 나만을 차별하는 마음 당신의 무차별이 나는 싫어요 나의 사랑은 차별을 좇아요 개운포에서 망해사望海寺 담벼락까지 노송의 가지들은 풍성하게 휘어져 너그러운 당신에게 돌아가라 하지만 나는 울타리를 넘는 고라니의 뒷다리 고사하는 천년 느티나무에서도 새싹이 트듯 늘 새로 일어나는 마음 모두 극락을 가고자 한다지만 나는 차별하는 이승이 좋아요 결계를 넓히는 산문山門의 마음 따위 나에겐 필요 없어요 당신의 차별만이 내게 행복이고 용을 좇는 것이 나의 삶인 것을 당신은 미간 외에 이마에도 눈이 있어 전생부터 현생까지 꿰뚫어 보고 딱하다는 듯 무료한 햇살을 무차별로 마구 펼치는데 2024년 봄호 발표 ---------------------------..
멧비둘기가 내 시를 무려 1시간이나 읽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참으로 애절한 친구다. 흔하게 듣는 소리지만 누가 저리 섧게 우는지 몰랐을 거다. 멧비둘기 되시겠다. 그럼 우리가 아는 도심지 닭둘기는 저렇게 안 우는가? 그렇다. 저리 울리지 않는다. 단언컨데 배부른 자는 저리 울 수 없다. 아시다시피 나 같은 화전민 후예 정도는 되어야 아, 멧비둘기구나! 하며 같이 서러워하는 거다. 물론 내가 화전민 출신이라는 건 안 궁금하겠지만 강원도 홍천과 인제 등지의 화전민은 동학 3차 전쟁 이후 흩어진 이들이었다. 동지는 죽고 살아 남은 그들은 얼매나 고독했겠는가. 그리 숨어 살다 살아남았다. 동경대전 초판이 인제 갑둔리에서 괜히 인쇄된 게 아니다. 울 아부지는 내촌 백우산 자락의 어느 동굴에서 ..
1. 작가 소개 : 르네 고시니 (René Goscinny) 1926~1977 미국 대중문화에 밀려 계속 궁지에 몰리던 문화대국 프랑스의 자존심을 유일하게 지켜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스테릭스’이다. 만화만큼은 당당하게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며 프랑스의 정상에 우뚝 서있는 ‘아스테릭스’는 프랑스인들뿐만 아니라 아스테릭스를 모르고서는 유럽인과 대화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인들의 자존심으로 미국대중문화를 압도하는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작가가 바로 아스테릭스의 글을 쓴 작가 르네 고시니이다. 그는 코믹하고 유머러스한 화풍의 알베르 우데르조와 함께 프랑스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감각적 유머에 기초한 고전적인 만화 시리즈(1999년 영화화/2005년에는 애니메이션)로 프랑스..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달리아가 움직이지 않게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무성하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돌아오는 채소밭 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김수영 시전집 중에서 이 시는 주술적 성격이 있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를 반복하면서 '더' 그 의미를 점층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부탁의 형식이면서 명령하고 있다. 기운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일수록 그 의미를 강화되고 절박해진다. 기운을 주라는 반복 외에 강바람, 달리아, 채소밭, 바람이 등장한다. 주어야 하는 주체와 그 기운을 받는 객체는 무엇인가?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라는 마지막 구절로 보아 바람에 마르는 아침 이..
동동이 마음먹고 흰 강아지를 데려왔다 동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름답게 기운이 넘쳤다 이 녀석이 오기 전 화와 분노가 나를 갈아 대고 있었다 가슴엔 불구덩이가 살았다 녀석과 살기 시작했을 뿐인데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개가 나를 구했다면 믿겠는가 박용하 동시집 중에서 나는 아직 동물을 집에 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아직 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딸이 셋이나 있고 어린 내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만으로 위안이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이 되는 것이 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뿐이다. 누구에게는 나무가 그렇고 누구에게는 꽃이 그렇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그래서 같이 살기도 하는 거다. 시인은 동동이가 사람이 아니어서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변화시켰다고 한다. (한승태) 얼굴 제 어머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