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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전윤호 본문

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전윤호

바람분교장 2020. 5. 3. 14:11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이삿짐을 싸는 데 익숙해진 그녀는
내가 없어도
쉽게 떠날 준비를 끝낸다
내 몫으로 남겨진 가구나 이불들은
너무 낡거나 무거워서
버리고 가도 괜찮은 것들이다
필요하다면 가볍게
그녀는 기르던 개도 이웃에 준다
함께 산 지난 오 년 동안 기른 머리를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싹둑 자른 그녀는
요즘 취한 내 옆에서 자지 않고
슬그머니 부엌으로 빠져나와
주소를 쓰지 않은 편지를 쓴다
송곳니가 빠진 날 무표정한 얼굴로
오래 살펴보면서
냉장고와 함께 밤을 새는 그녀는
낯설게 아름답다



시집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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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이 사랑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당신은 늘 거기쯤 있어야 하고 늘 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남편들이 하는 착각들이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나는 아내의 울타리 안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 있다. 손 안에 있지 않는 사랑은 대개의 아내들에게 불안을 야기할 뿐이다. 그건 불화로 이어지고 불화는 더러 체념으로 이어진다. 체념은 냉담으로 이어진다. 냉담한 아내야 말로 새롭게 아름답다. 그게 나의 착각이고 사랑의 착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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