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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제비꽃 다시 돌아왔다, 무덤가 제비꽃 겨우내 그 미련함만 뽑아내기로 한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 참 송구하다 결국은 내가 속고 마는 경지가 아니고서야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봄 뽑아낸 자리마다 미련은 피고 또 핀다 한승태 시집 중에서
이민진 를 읽고 정이삭 감독의 영화 를 보았다. 의 첫 문장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괜찮아’였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일제의 식민지와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했던 우리 조부모 세대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니 이 소설의 탄생지는 식민지 조선이다. 부산의 작은 섬, 영도에서 시작된 여정은 일본 오사카로 도쿄로 요코하마로 이어져 일본 내 자이니치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선자를 중심으로 여자의 삶은 고생길이라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실현된다. 여자들에게 행복은 잠시 지나가는 바람이다. 행복도 고생도 남자에게서 온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파란만장이 여자의 삶이다. 소설은 방대한 4세대의 이민사를 설명에 의지하면서도 스킵기법으로 순식간에 정리한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았고 흡입력도 있었다. ..
등이 열린 사람 어느 밤이었다 경사가 쌓인 인도를 올라가는 사람의 등을 보고 있었다 어느 밤이었다 등이 열린 사람을 보고 말았다 이 세상의 구멍이 거기에 있었고 나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 등으로 어둠이 들어가고 있었다 셀 수 없었지만 어둠이 그 등을 가득 채우자 등에서 더 짙은 어둠이 쏟아지고 있었다 등이 열린 사람을 보았다 등이 열린 사람이 비탈진 길을 오르고 있었다 안주철 시집 중에서 ------------------------------------------- 등이 열린 사람은 어둠 속의 사람이고 어둠을 불러들이고 어둠을 쏟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주변에는 불빛조차 허락되지 않기에 그는 실루엣으로만 존재한다. 그는 구분되지 않는다.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실루엣은 거기서 나와 어둠과 교감..
강 문정희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다 울다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이 사라진 자리 오소소 냉기가 자리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 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인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囚人)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에 얽혀 눈도 귀도 없이 늪에 사는 물귀신들아 끝없이 간섭하던 기도 속의 현모야, 양처야, 정숙아, 잘 가거라. 자신을 통째로 죽인 희생을 채찍으로 우리를 제압하던 당신을 배반할 수 없어 물 밑에서 숨 쉬던 모반과 죄책감까지 브래지어 풀듯이 풀어 버렸다 어머니 장례 날, 여자와 잠을 자고 해변을 걷는 사내*여 말하라. 이것이 햇살인가 허공인가 나는 허공의 자유, 먼지의 고독이다 불쌍한 어머니, 그녀가 죽자..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 불편당 일기 벌건 숯이 담긴 화로의 잿불 속에 시린 발목을 파묻고 싶은 혹한의 밤, 요강을 씻은 손으로 쇠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었지 괜찮아 쩍쩍, 달라붙어도 괜찮아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잖아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저 터무니 없는 약속, (예컨대, 정치인들의 약속!)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잖아 식구들이 타고 앉은 요강 속 오줌에도 살얼음이 끼는 밤,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빌고 또 빈다 고진하 시집 중에서 목사이며 시인인 고진하 시인께서 정말로 우리가 골고루 가난해지길 바란 걸까?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다며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터무니없는 약속을 꺼내 들었을 때 우린 알게 된다. 가난한 마술이야 혹한이 찾아오면 발생하지만 혹한이 아니어도 선거 때만 되면 잘 살..
운명이다 애막골 근처 오월의 논길을 걸으면 온통 개구리 울음이다 울음뿐인 골짜기를 지나면 은하수 가득 벼들의 눈물도 흐르고 눈물에 젖고 나면 별들은 일시에 무너져 내려 몸을 헤집고 살 부비는 종소리 깊게 퍼져나가고 누가 당신에게 울음을 옮겨놓았나 손바닥으로 별을 쓸어보는 밤이다 은하수엔 숭어 떼 뛰고 함부로 던진 훌치기바늘은 등허리를 헤집고 질끈 눈 감은 울음은 논바닥에 나뒹구는 밤이고 어차피 혼자인 밤이고 소쩍새 나는 밤인데 한승태 시집 _사소한 구원_ 중에서
맨발 맨발로 논에 들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흙살이 솟구쳐 올랐다 뭉글뭉글 가슴이 울렁거린다 논바닥이 맨살을 열고 나를 온몸으로 받는다 아아, 발을 옮길수록 아득해지는 깊이 부르르 몸을 떨다가 마침내 절정에 가닿았다 맨발로 벌거벗은 진흙 속에 내 몸을 담갔다 드디어 내가 논두렁에 서서 논바닥의 마음을 훔쳤구나 신승근 시집 중에서 대지에 몸을 얻는다는 건 야릇하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올라오며 감싸안는 에로티즘에 몸이 열린다. (한승태)
감자꽃 필 무렵 언제든 떠날 애인이었다 집은 자주 비었고 방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개들이 짖는 게 낯설지 않았고 괭이들이 뒤돌아보며 뒤란에 몸을 숨겼다 내 모르는 소문이 떠돌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그믐밤도 길은 환했다 애인이 떠난 저녁이었다 허림 시집_ 중에서 이제 감자꽃은 지고 땅속 근육을 키워온 감자들은 지상 위에 올라와서 다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한 남자의 저녁은 아직도 그대로다. 새벽녘 잠깐 뜬다는 그믐달에도 그는 실루엣으로 남았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 -F. 카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