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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키친가든 / 함성호

바람분교장 2019. 11. 1. 09:09

키친 가든

함성호

 

네 자 다섯 자의 조그만 정원

단풍나무와 콩배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고

낮은 담을 둘러

아침 햇살을 들여놓은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자라는

 

키친 가든에서

오이를 다듬고, 팬을 달구고

데치고, 간을 맞추고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는

 

키친 가든에서

아욱이 자라고 대파가 통통해지고

감자에 싹이나고

부추가 삐죽해질 동안

딸기가 익어가는 동안

콩과 시금치가 맛이 드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끓는 소리, 찧는 소리, 씻는 소리

스-윽 베는 소리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이윽고

우리가 심은 씨앗들이,

모르는 동안이,

샐러드가 되고, 파강회가 되고,

수프가 되고, 무침이 되었을 때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말했다

"누구와, 가 아닌 음식은 쓰레기지"

감자와 딸기와 부추가 말했다

"향기가 없는 나물을 씹는 것 같애"

-그녀를 위로해줘

 

이제는

파꽃이 피고, 곰취가 웃자라고

배추가 시들고, 잡초만 무성해진

모르는 동안만 사랑했던

네 자 다섯 자의

 

키친 가든에서

 

 

시집 <타지 않는 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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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게 詩지. 풍성한 이 시는 보는 즉시 냄새가 나고 웃음이 장면을 만든다. 행복하기 위해서 온 우주가 함께 한다. 나도 모르는 동안 우주는 함께 해왔다. 햇살이, 바람이, 나뭇잎이, 파와 감자와 아욱이 자라고, 소란스런 요리 소리들이 "누구와, 가 아닌 음식은 쓰레기지”왁자지껄 하며 함께 어울린다. 나도 모르는 동안에 초대를 받은 사람도 있고, 초대를 한 사람도 있다. 그 누구여도 관계없다. 준비하는 동안, 요리를 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괜찮다. 함께 했기에 이미 왁자지껄하고 흥성해졌다. 그러니 약간 부족한 그녀나 그를 위로해줘야 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모르는 동안의 그녀를 위로해 주고 나도 위로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모르는 동안 위로 받는 아침이다. (한승태)

 

 

함성호의 시집 <타지 않는 혀>에 대한 메모

 

함성호의 <타지 않는 혀>는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시다. 전체를 구성하는 시편이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어 꼬여있다. 승승혜불가명繩繩兮不可名처럼 한편의 인생이다. 그래서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신의 말씀을 번역하는 것이 시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지난 <키르티무카>는 인도 신의 말씀을 들려주었듯, 이번 시집은 부처 말씀을 번역한 구마라집의 목소리를 빌려 노래하고 있다.

음악은 신에게 바쳐진 음식이다. 그걸 먹은 자, 신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니 그는 우리 신체의 감각을 극단으로 밀어부쳐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미지를 찾는 감각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은 그런 음률이 색으로 변환되어 보여진다. 내가 음악을 조금 알았다면 좀 더 풍성하게 느낄 터인데 하여간 그는 청각을 시각으로 후각을 청각으로 번역하여 감각 너머를 보여준다.

감각의 충돌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듯, 하나의 감각을 건드리면 감각의 다발이 연결되어 미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집 읽기의 새로움이며 즐거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상징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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