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2)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키친 가든 함성호 네 자 다섯 자의 조그만 정원 단풍나무와 콩배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고 낮은 담을 둘러 아침 햇살을 들여놓은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자라는 키친 가든에서 오이를 다듬고, 팬을 달구고 데치고, 간을 맞추고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는 키친 가든에서 아욱이 자라고 대파가 통통해지고 감자에 싹이나고 부추가 삐죽해질 동안 딸기가 익어가는 동안 콩과 시금치가 맛이 드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끓는 소리, 찧는 소리, 씻는 소리 스-윽 베는 소리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이윽고 우리가 심은 씨앗들이, 모르는 동안이, 샐러드가 되고, 파강회가 되고, 수프가 되고, 무침이 되었을 때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말했다 "누구와, 가 아닌 음식은 쓰레기지" 감자와 딸기와 부추..
현기증 너는 내 접시에 조개를 건네주었다 미처 해감하지 못한 흙이 씹혔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왜 하필 너는 이런 걸 언젠가 너와 나는 낯선 곳을 찾아 무작정 걸었다 어딘가에 닿으면 우리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는 바다로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실패한 ..
농협장례식장 최금진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은 농협장례식장 밭 갈다 죽은 사람, 감자 심다 죽은 사람 모두 녹슨 호미 같은 손 내려놓고 다급히 이곳으로 온다 마을에서 제일 깨끗하고 제일 따뜻하고 시원한 곳 작은 소로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 데서나 바다를 만나 듯 농약치고 풀 뽑고 거..
페이스북 친구인 이만교 작가의 글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이 정도야 아는 이야기지만 읽고 나면 아프다. 아픈데 또 읽게 된다. 이런 게 문학의 언어다. "대화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니 하는 말인데, 대기업이 고객을 상대하는 대화 방식은 참 재밌다. 나는 결코 대기업 책임자는커녕 ..
육림랜드 한승태 한 때 육림育林의 날이 있어 이 공원을 위한 날로 알았다 육림연탄에 육림극장을 거느린 지방 소도시 꼬맹이였느니 그럴 만도 했겠다 공원 안에는 팔각정이 있고 한 때는 거기서 결혼하는 것으로 삼촌은 품위를 보장받았다 내게는 대회전차니 바이킹보다 곰과 호랑이가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
봄비 흰 사기요강에 부서지는 별빛과 가랑이 벌린 山할미 엉덩이 아래는 천개의 봉우리와 천개의 골짜기 아이를 비워낸 자리엔 소쩍새 울음 닮은 삼백예순날 산 주름만 남아 주름이 주름을 불러 한숨을 만들고 가없는 넓이로 눈앞에 막막히 펼쳐져 올 때 일월성신은 뒤치다꺼리로 일만 년째 하늘을 돌고 또 돌아도 늘어진 저 배는 쉬는 중인지 부푸는 것인지 서리는 해마다 내리고 내려 버캐처럼 쌓이고 쇠리쇠리한 햇발에 주름이 접혀서 길을 걸으면 뒷덜미가 따뜻해지고 웃음도 따라오는 것이다 내 몸주는 맹인의 욕망이 깃든 햇살일지니 할머니, 하고 부르면 산은 오줌소태마냥 쬐금쬐금 되물으며 내 배꼽으로 스며들어, 골짜기가 숨겨둔 항아리란 항아리 죄다 갑자기 간장 달이는 냄새를 진하게 날리고 神들은 내 안으로 마구 들어차는 것이다..
미술계에서 뒤샹을 비판하는 것은 금기에 가까워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며 재외화가 이우환은 현대문학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뭐니뭐니해도 현대미술의 대부와 같은 존재이자 압도적인 지지와 영향력을 지닌 거인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회화든 조각이든 철저히 신격화되..
겹 김안 모든 끔찍한 일들이 한 사람만의 탓인 것처럼 우리가 보아야만 했던 그 모든 비극과 단순과 비참들이, 그리고 일상을 나누던 이 방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도 싸우는 이유조차도 죽이고 싶도록 죽고 싶도록 한 사람만의 탓인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말보다 빠르게 단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