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1)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길모퉁이 아폴리네르 불상한 늙은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다, 일 시켜 줄 사장 하나 없나. 그들은 기다리며 몸을 떤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그들은 서로 말을 나누지 않는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기에. 이따금 그 가운데 하나가 구시렁댄다, 씨팔 하느님 제발, 아주 낮게. ..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
로드 킬 신덕룡 나뭇가지인가 했는데 머리가 경운기 바퀴에 깔려 으스러진 살모사였다 죽은 살모사가 들길을 걷는 내게 맹독성의 삶도 아차, 하는 순간 추락할 수 있다는 걸 말해주었다 살모사의 전생은 당당했으리라 거칠 것 없던 한여름의 풀숲과 한 번도 사냥에 실패한 적 없는 날카로..
늙은 조르바를 만나다 이승호 뜨거운 날들의 다음날을 나는 알고 있지 목숨을 연명하자면 낭만주의자가 되어야 해 신문 따위는 읽지 말고 드라마에 빠져 내일을 기약하며 고스란히 늙어야지 도통한 척 생의 속도에 맞춰 산책하는 사람들처럼 인류가 자신의 연인으로 선택한 변함없는 시간들을 음악으로 바꿀 줄 안다면 굳이 사랑을 발명하지 않아도 돼 천체의 운행이 너를 책임져 줄 테니까 강줄기를 넘어가고 넘어오는 새들처럼 바람에 쓸리는 낙엽들조차 생의 기쁨이 있다고 이제 내 노래를 들려주랴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그토록 인간이 되려고 애쓰고 있지 이승호 시집 중에서 ----------------------------------- 사람의 삶이 진창이었다고 느낄 때는 이미 진창을 빠져나온 뒤이거나 죽을 때이다. 보통 나이 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
헤매는 잉거스*의 노래 나 개암나무 숲으로 갔네. 머릿속에서 타는 불 있어 나뭇가지 꺾어 껍질 벗기고, 갈고리 바늘에 딸기 꿰고 줄에 매달아, 흰 나방 날개짓하고 나방 같은 별들 멀리서 반짝일 때, 나는 냇물에 그 열매를 던져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 낚았네. 돌아와 그걸 마루 바닥에 ..
걸어보지 못한 길 로버트 프로스트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전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신호탄 마을들은 내면의 어둠 속에서 타오른다 농부 여자가 갈베스톤으로 가는길에서 차를 운전한다 누가 저 신호탄을 쏘아 올렸는가 아무튼 너는 문을 열어 놓을 것이며 그리고는 길게 톱질하는 바람이 네 안에 유령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리라 너의 혀 네 목소리의 어항 속 붉은 물고..
박세현 시집_저기 한 사람 일단 그의 시는 유쾌하다. 점잔 빼고 무게 잡지 않는다. 그게 가장 큰 미덕이다. 시라도 한번 웃게 해주고 근심을 덜어준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저기 한 사람이 박세현일 것이고, 그는 자문자답의 혼자 가는 길을 가며,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사람이며, 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