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5)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일신상의 비밀 전윤호 또 겨드랑이가 가렵다 침울한 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긁어보지만 참을 수 없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숙연한 영업실적 보고회의 감원을 해야 한다고 사장은 딱딱거리는데 문제는 내 겨드랑이다 삐죽 날개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옷을 벗을 때마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아내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개는 점점 자란다 조심해야 한다 내눈은 점점 위로 사무실 천장을 뚫고 옥상 위로 저 아래에서 날 부르는 날카로운 소리 하지만 난 맷돌에 눌려 죽은 아기처럼 자꾸 겨드랑이가 가렵다 전윤호 산문집_내겐 아내가 있다 중에서 압권이다. 이 시대 직장인의 소망이나 삶의 상황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다. 한 번만 읽으며 뭔 얘기인지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는 쉬운 시다. 쉽다고 그 ..
짐승의 안쪽 박지웅 어수룩한 개는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쥐약과 건넛산에 놓인 달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빛나는 달이 뒤뜰로 떨어지면 빛처럼 달려갔다 키우던 개와 닭은 주로 화단에 묻혔다가 이듬해 유월 머리가 여럿 달린 수국이 되었다 둥그스레한 수국 머리를 쓰다듬으면 묶인 새끼들이 먼저 알아보고 낑낑댔다 한동안 흙과 물과 바람과 섞여 백수국은 낯가림 없이 옛집 마당을 지켰다 닭이 다 자라면 날개를 꺾어 안고 시장에 갔다 닭장수는 모가지를 젖혀 칼질만 스윽 냈다 닭이 던져진 고무통 속에서 둥둥 북소리가 났다 피가 다 빠진 뒤에야 잠잠해지는 짐승의 안쪽 잠자리에 들 때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핏발선 꽃들, 힘세고 오래가던 어지럼들 닭 뼈다귀를 화단에 던져주면 수국은 혈육처럼 그러안고 밤새 핥는 것이었다 ..
오래된 정원 전윤호 아버지 집에는 라일락 나무가 있었네 지금은 사라진 마당에 봄이면 향기가 먼저 오고 문을 열면 꽃이 피었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던 연탄불이 꺼진 방 조퇴하고 누워 있으면 나뭇가지가 이마를 짚어주었네 나와 자던 고양이가 올라가던 나무 그 앞에 서면 우주가 나를 반겼네 아버지 집에는 엄마가 없었네 라일락 나무가 내 방 앞을 지켰네 봄이면 아직도 열이 오르고 몸살을 앓는데 아버지 집은 내 안에 있어 기침할 때마다 라알락 향기가 올라온다네 전윤호 시집 중에서 오래된 정원은 우주의 정원이고 내 안의 정원이고 어머니의 품이다. 그 정원에는 우주나무, 즉 어머니 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라일락이다. 문제는 그 정원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고, 그 집에는 어머니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 없는 집은 집..

나는 노새다 _한승태 상상의 동물이 아니다 노새는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난 튀기다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서 나온 새끼는 버새다 노새와 버새는 새끼를 낳지 못하는 불구다 크기는 말만하나 생김새는 당나귀를 닮았다 한때 노동 세계에서 힘깨나 쓰는 것으로 인기였다 몸은 튼튼하고 아무거나 잘 먹고 변덕 심한 주인도 잘 견디어 정신병에 걸리는 일도 없다 말없이 무거운 짐과 외로운 길도 능히 견딘다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다
삶, 삶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 나는 예감을 믿지 않는다. 전조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비방도 원한도 피하지 않는다. 세상에 죽음이란 없으니까. 아무도 죽지 않는다, 아무 것도 죽지 않는다. 열일곱 살에도 일흔 살에도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세상엔 삶과 빛만이 존재할 뿐, 죽음도 어둠도 없다. 우리는 모두 지금 해변가에 있다. 마침내 불멸이 무리지어 몰려올 때 나는 그물을 걷는 한 사람. 집에서 살면 집이 무너지진 않으리. 나는 백년 중 아무 시간이나 불러 거기로 가서 집을 지으리라. 이것이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의 아내들이 나와 함께 한 식탁에 앉아있는 이유. 이 식탁은 할아버지에게나 손자에게나 같다. 미래는 현재에 이루어지는 법, 내가 손을 들어올리면 모든 다섯 개의 빛이 당신 곁에 머물리라. ..
5월 23일 박용하 그가 가고 난 자리에 뒤가 남았는데 그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죽임이어서 남아 있는 자를 못 견디게 한다. 그가 삶이었을 때 밥값 술값 내는 인생 선배나 어깨를 내주며 노래를 불러 젖히는 동무쯤으로 생각했다. 강자한테 대들고 약자한테 함부로 안 하는 사람이어서 팬이 됐다.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세상에서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 얘기야 없는 게 아니지만 뒤 같은 거 쳐다보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그가 떠난 뒤를 더 돌아보게 된다. 내가 놀던 자리, 내가 머물던 자리는 어떠했던가. 앞으로 나서지 못해 뒤에서 숨죽인 날들의 기억 속에서 하염없이 뒤를 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절벽을 붙잡는 심정으로 뒤를 잡아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맨땅에 헤딩해 권력을 쥐었다. 그게 ..
모른다 그 먼 길을, 모르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 내게서 떠나간 모든 이별과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몸을 나는 모른다 피고 지는 것들의 그 끝없는 소모를 비바람 눈보라 빗금을 뚫고 건너가던 한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태양을 끌고 가는 개미의 시간과 네게로만 몰려가는 피의 까닭 ..
사소한 시인 전태화와 장명화의 아들인 전윤호는 시를 쓴다 안현숙의 남편이고 전용걸과 전홍걸의 아버지인 전윤호는 시인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노무현이 자살한 시대 일본에서는 방사능이 새어 나오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자유를 외칠 때 전윤호는 방구석에 앉아서 시를 쓴다 ..
서른아홉 사십이 되면 더 이상 투덜대지 않겠다 이제 세상 엉망인 이유에 내 책임도 있으니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무조건 미안하다 아침이면 목 잘리는 꿈을 깨고 멍하니 생각한다 누가 나를 고발했을까 더 나빠지기 전에 거사 한 번 해보자던 일당들은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아 하루 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