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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봄비

바람분교장 2019. 5. 19. 20:01

봄비

 

 

 

흰 사기요강에 부서지는 별빛과

가랑이 벌린 할미 엉덩이 아래는

천개의 봉우리와 천개의 골짜기 

아이를 비워낸 자리엔 소쩍새 울음 닮은

삼백예순날 산 주름만 남아

주름이 주름을 불러 한숨을 만들고

가없는 넓이로 눈앞에 막막 펼쳐져 올 때 

일월성신은 뒤치다꺼리로

일만 년째 하늘을 돌고 또 돌아도

늘어진 저 배는 쉬는 중인지 부푸는 것인지

서리는 해마다 내리고 내려 버캐처럼 쌓이고

쇠리쇠리한 햇발에 주름이 접혀서

길을 걸으면 뒷덜미가 따뜻해지고

웃음도 따라오는 것이다 내 몸주는

맹인의 욕망이 깃든 햇살일지니

할머니, 하고 부르면 산은

오줌소태마냥 쬐금쬐금 되물으며 

내 배꼽으로 스며들어, 골짜기가 숨겨둔

항아리란 항아리 죄다 갑자기

간장 달이는 냄새를 진하게 날리고

들은 내 안으로 마구 들어차는 것이다

 

 

한승태, 시집 <바람분교>, 달아실 2023.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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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셨나요? 지금 신화처럼 내리는 봄비를 썼는데, 비 오는 산에 들면 뭔지 금방 몸으로 이해할 겁니다. 모 평론가는 과거의 정서를 잘 간직했다고 평을 했어요. 아닌데, 과거가 아닌데 말입니다. 봄비라고요. 오늘 내리는 봄비입니다. 그래요, 과거 정서를 간직하고 있지요. 물론 이 시가 새로운 언어는 아니지만 과거 얘기는 아닙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현재 이야깁니다. 다만 인간만의 얘기가 아닐 뿐, 저 신화적인 비를 맞는 게 어디 인간뿐이겠어요. 배꼽에서 탄생해 비에서 자라나는 신화를 말하고 싶었는데요.

 

 

예전에는 겨우내 목욕을 자주 할 형편이 못되었지요. 애들은 그마저도 추워서 싫어했고요. 봄 방학이 지나면 좀 따스한 바람이 불고 논을 삶으면 간혹 비가 내렸던 것인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젖은 몸을 아랫목에서 말렸습니다. 젖었다 마른 몸에서 나는 냄새를 기억하는지요? 김유정 <소낙비>에서 춘호 처가 모욕을 받던 냄새, 그건 배꼽에서 나는 냄새인데 흡사 간장 달이는 냄새 같았어요. 물론 과거의 기억이 만든 상상이긴 해요. 독자가 이런 추억은 몰라도 되고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봄비에 젖어서 새싹을 틔우는 건 사람만이 아니지요. 제 몸과 만물이 연결되는 지점, 만물이 그렇게 깨어나서 푸르러지니까. 바로 내 눈앞에 푸른 신화가 출렁이는 건 지금이지요. 아닌가요? (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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