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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샘과 근대 신화 본문
미술계에서 뒤샹을 비판하는 것은 금기에 가까워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며 재외화가 이우환은 현대문학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뭐니뭐니해도 현대미술의 대부와 같은 존재이자 압도적인 지지와 영향력을 지닌 거인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회화든 조각이든 철저히 신격화되어 부동의 평가를 얻고 있다. 종래의 미술제도나 콘텍스트에 의한 산화를 해체했던 사람이 새로운 신화로서 군림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마르셀 뒤샹은 근대 산업사회에서의 사물의 出所에 조준을 맞춰 공장 생산품인 남성 변기에 '샘'이란 이름을 붙이고, 화장실이 아닌 전람회장으로 옮겨놓았다. 그가 햇던 것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에 제목을 붙여 전람회 회장에 진열한 것으로, 이른바 근대의 물품의 성립제도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상대로 일대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결과야 어쨌든 간에, 이는 주지하는 바처럼 예술의 기성 개념, 곧 수공이나 일품주의에 대한 야유나 비판이 담겨 있을 터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물, 새로운 예술 탄생의 謳歌가 들렸을 것이다. 또한 그 이상으로 본다는 것의 신화를 폭로하는 터뜨림이엇을 것이다. 1917년 당시, 참신한 테크놀러지나 오토매이션의 등장으로 사회가 일변했던 분위기에 비춰 보앗을 때, <샘>의 출현은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상징했다.
이 작품에 의해 예술작품의 리얼리티 환상은 일순 날아간 듯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물의 이름이나 그와 얽힌 잦은 생각, 그것들의 의미를 벗겨낸다면 거기에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것은 무언의 사물이라고도, 그냥 사물이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뒤샹의 <샘.은 그 점을 찌르고 있다. 이 엘리트 지식인의 고도의 조작에 의해 변기는 농락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겠다. <샘>은 그동안 다양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아이러니의 메타포로서 또는 독창성이나 리얼리티의 미망을 타파하는 혁신적인 걸작(?)으로서 이미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술계의 신전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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