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1)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홍어 문혜진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
정주성(定州城) 백석 산텃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간이 ..
수라(修羅)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
여 승(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
드라이아이스 송승환 다시 내린 눈으로 바퀴 자국이 지워졌다 찌그러진 자동차가 견인되었다 앰뷸런스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눈물 없이 울던 그녀의 뒷모습 새벽 안개와 함께 지상에서 걷혔다 불을 품은 뜨거운 얼음에 데인 적이 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중에 녹아 사라진다 하늘 한..
나사 송승환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 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에서 눈부신 햇살도 죄어들기 시작한다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을 새들을 몰고 와 쇳소리를 낸 다 그 속에 기름 묻은 저녁이 떠오른다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만 큼 깊어지는 어둠 한번 맞물리면 쉽..
테트라포드 송승환 머리는 가까이 허리는 더 가까이 사내의 한 손 여인의 허리 뒤엉킨 연인의 정지 자세 하늘을 향해 치키든 여인의 허연 허벅지 하나의 가슴 네 개의 다리 폭풍우 속 해변의 탱고 * Tetrapod. 원뜻은 사지(四肢)동물. 방파제 아래 쌓아둔 콘크리트 블록.
가물거리는 그 흰빛 이근일 병원 침대에 눕자마자 내 얼굴 위로 흰빛이 쏟아진다 심전도기계 위로 드르륵 종이가 말려 올라오는 동안 나는 내 양 옆구리에서 길게 돋아난 핑크빛 지느러미를 보았다 잠시 심해 속을 유영하는 나를 떠올렸던가, 불현듯 내 안에서 고래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유리문 안에서 이근화 구체적이고 가혹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소세키의 문을 두드렸다 소세키는 몸이 아팠고 기운이 없었지만 손님에게 차와 방석을 내놓았다 여자들은 울었고 남자들은 화를 냈다 모든 것이 너무 가깝거나 멀었지만 사람들은 둘 이상의 질문을 동시에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