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5)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조금씩 세르게이 에세닌 * 이제 우리들은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고요함과 행복이 있는 그 나라로, 어쩌면 나도 곧 길을 떠날는지 모른다. 덧없는 세간살이를 치워야 한다. 그리운 자작나무 숲이여! 너 대지여! 그리고 너 모래벌판이여! 이러한 떠나가는 동포들의 무리 앞에..
소박한 시 Jose Marti 나는 종려나무 고장에서 자라난 순박하고 성실한 사내랍니다. 죽기 전에 내 영혼의 시를 여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내 시 구절들은 연두빛이지만 늘 정열에 활활 타고 있는 진홍색이랍니다. 나의 시는 상처입고 산에서 은신처를 찾는 새끼 사슴과 같습니다. 7월이..
겨울을 기다리며 서경구 외투와 장갑을 잊고 단열창 닫으며 더운 물에 머리 감고 이제 더 이상 아무 이웃도 그립지 않은 우리에게 사랑보다, 사랑을 감추려고 껴안던 추억을 끊은 우리에게 우리에게 이제 겨울은 무엇인가. 소리만으로도 너끈히 밤을 가리는 문풍지와 쩍쩍 달라붙는 手人事의 끔찍했..
꿈의 구장 이근화 바람이 많아지고 몇 개의 모자가 날아가고 잠은 아주 얇아졌지 꿈의 커튼을 열고 날아오르는 야구공, 글러브, 부러진 방망이. 나는 베이스 런닝의 순간이 좋아 멀리서는 뚜렷했던 것들조차도 가까운 곳에서는 희미하지만 한 때 우리는 서로 아름답게 엉켜있었지 나는 길 위에서..
홍어 문혜진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
정주성(定州城) 백석 산텃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간이 ..
수라(修羅)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
여 승(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
드라이아이스 송승환 다시 내린 눈으로 바퀴 자국이 지워졌다 찌그러진 자동차가 견인되었다 앰뷸런스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눈물 없이 울던 그녀의 뒷모습 새벽 안개와 함께 지상에서 걷혔다 불을 품은 뜨거운 얼음에 데인 적이 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중에 녹아 사라진다 하늘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