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1)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
“시는 실천적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 까다로운 내 친구들에게 / 폴 엘뤼아르 만약 내가 숲속의 태양이 침대 속에 몸을 맡긴 여자의 아랫배 같다고 말하면 당신들은 내 말을 믿고 내 욕망을 이해하지 만약 내가 비 오는 날의 수정방울 소리가 사랑의 무료함 속에서는 늘 울린다고 ..
나비와 광장 김규동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 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
거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
“응”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
입춘에 매화를 걸다 조성림 곤줄박이 끝끝내 얼었던 발을 풀며 비어서 눈부신 자작나무를 건너서 맨 먼저 비장한 음색을 나뭇가지에 걸고 있다 그 비장한 틈에 나도 매화가 만개한 족자를 방에 내다걸며 감히 매화를 허투루 받아도 되는 걸까 하고는 매화가 오는 공중을 빈손으로 쓰다듬어 보는데 저 ..
시계 L'horloge 시계! 무섭고 냉정한 불길한 신, 그 손가락이 우리를 위협하며 말한다: "잊지마라! 진동하는 <고통>이 두려움 가득한 네 심장에 머지않아 과녁처럼 꽂히고, <쾌락>은 안개처럼 지평선 너머로 스러지리라, 무대 뒤로 사라지는 공기의 요정처럼. 누구에게나 제 계절마다 허락된 향락..
6 돈을 탕진하고, 육신을 탕진하여 자신의 죽음을 장식하는 이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당신들의 바깥; -- 나는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바람과 태양의 즐거운 바깥을 들으며 곡기를 끊고 나의 죽음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체제여 제발, 나에게 국민연금 내라고 자꾸 비문학적인 엽서나 보내..
포옹 박용하 희미한 어둠 속 계단에 서서 그대 등 뒤로 손을 깍지 껴서 이승을 불 밝히면 심장 저 멀리 낮게 엎드린 눈물 그대 머리카락 적시러 지상으로 온다 시집 중에서 시야에 수평선이 확보되자 비로소 수직선이 솟았다. 대지는 속에서 뚫고 올라와야 하고 하늘 더 깊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대지는 물의 힘으로 자란다. 하늘은 어둠의 힘으로 넓어진다. 땅에서 하늘로 다시 땅으로 물이 순환하는 순간, 행복은 그 한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넘치거나 모자라면 다다를 수 없다. 넘치면 고통이 커지고 모자라면 갈증이 커진다. 하늘과 대지가 결합되는 것처럼 포옹은 근원적이다. 오래 전 새해 첫날 연하장으로 보내 온 그의 시, 우리가 껴안고 있는 것이 사랑만은 아닐 것이다. 이승의 모든 삶에 불을 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