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1)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여 승(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
식당 -아드리엥 폴랑테 씨에게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농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농.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샘가에서 목이 안 보이는, 목이 없는 바다 서해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연애에 대하여 밥에 대하여 네 살엔 흔적이 없다 아들에게 금기 음악 밤은 넓고 드높아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네가 ..
개와 향수병 "내 아름다우신 개, 내 착하신 개, 내 사랑스러우신 멍멍이님, 이리 가까이 오셔서 이 훌륭한 향수 냄새를 맡아보시오. 시내에서도 제일가는 향수가게에서 사온 것입니다." 이 말에 개는 꼬리를 치면서, 아마도 그게 이 가련한 짐승들에게는 웃음과 미소에 해당하는 표시인가 ..
허망한 나라의 시인 진이정 -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한승태(시인) ‘시인의 생애 속에서가 아니라 시인의 영혼 속에서 우리는 시인을 찾을 수 있다.’ 페데르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이 말을 단서로 우리는 진이정 시인을 찾아보자. 일단 그를 찾기 위해서 그의 구체적인 아트만이 시를 쓰며 살았던 1990년대를 돌아보자. 그때는 어떤 시대였던가? 그가 그렇게 못견뎌하던 시대, 그 불화의 흔적으로 남긴 시인의 영혼의 흔적을 찾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자. 알다시피 1990년대는 독재 권력과 싸움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반영하고, 세계적으로 소련의 붕괴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으로 혼란을 시작한다. 치열하던 장수들은 싸울 상대를 잃은 것처럼 칼을 던지고, 전원으로 돌아가거나,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
재의 맛 이진희 연한 송아지 고기는 더욱 부드럽게 대화는 한 모금 포도주를 굴리듯 우아하게 건배는 건배에서 건배로 이어 이어져 건배 아무리 아름다웠을지라도 이곳 눈부신 정원에 이식된 꽃들은 지친 표정을 들키는 즉시 뽑혀나가고 오늘 아침 고용된 앳된 악사들은 좀처럼 어두워..
대화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 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
타이가의 순록에게 -이근화 시인에게 순록과 나는 여행 중이었다 북위 56∼58° 순록은 타이가의 자작나무 숲을, 나는 내린천을 생각하지 않았다 타이가의 순록은 자작나무 숲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고 나는 순록 없는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을 알고 있었다 타이가의 순록에게 인사를 한..
조성림의 다섯번째 시집 를 다 읽었다. 남들은 다들 쉽게 금방 읽었노라고, 시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편으론 동의하고 한편으로는 유보를 하고 싶다. 그의 시는 분명 잘 읽힌다. 그의 시정은 아름답고 관조적이며 옛스럽다. 옛스럽다는 것은, 그럴리야 없겠지만, 분명 나만의 트집이겠지만 아름다움을 대하는 전통적인 서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습관적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어서이다. 그의 반열은 이미 이땅에서 살짝 발이 들려 신선같은, 현실보단 과거의 아름다움 위에 기반하고 있는 선비같다. 시의 행간의 긴장은 있으나 시 전체가 이 땅과 마찰하는 갈등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어른이다. 어른으로서 어른의 세계를 탐닉하는 걸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녀가 떠난 바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