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이성복 시집 본문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샘가에서
목이 안 보이는, 목이 없는
바다
서해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연애에 대하여
밥에 대하여
네 살엔 흔적이 없다
아들에게
금기
음악
밤은 넓고 드높아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입술
앞날
그렇게 속삭이다가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1959년
물결이었어, 밀쳐낼 수 없는 물결이었어
눈
여기가 어디냐고
겨울산
병든 이후
그 날
그렇게 속삭이다가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거울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이별 1.2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발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비 1.2
남해금산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강
다시 봄이 왔다
편지
정든 유곽에서
숨길 수 없는 노래
슬픔
비단길
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편지
편지 1
출애급出埃及
느낌
기다림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무언가 아름다운 것
그날
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벽지가 벗겨진 벽은
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노래는
모래내-1978년
차라리 댓잎이라면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시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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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 이 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 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을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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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 이성복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순간순간 죄는 색깔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때로 우리 머릿 속의 흔들리기도 하던 그네,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길바닥 돌 틈의 풀은 목이 마르고
풀은 草綠의 고향으로 손 흔들며 가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풀은 몹시 목이 마르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황황히,
가슴 조이며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지친 사내들은 처진 어깨로 돌아오고
지금 빛이 안드는 골방에서 창녀들은 손금을 볼지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물 밑 송사리떼는 말이 없고,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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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가에서 / 이 성복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몸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은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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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안 보이는, 목이 없는
바람의 판유리 깔아놓은 서해.
저 무대까리, 목이 안 보이는
아예 목이 없는 바다
아무것도 껴안을 수 없어
안기기만 바라는 바다
마냥 소리쳐도 말이 안 되는 바다
마냥 부대껴도 춤이 안 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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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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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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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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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 이 성복
아파트 입구에 내놓은 교자상이 비에 젖고 있다
지금 빗물은 호마이카 상판 위에 고여 있지만
모서리 틈새나 못 빠진 자국 찾아 들어갔다가
햇빛 나면 습기 되어 빠져나갈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든 새댁이 관리실 앞을 지나며 경비
노인에게 인사한다 거의 눈짓에 가까운 인사, 약간
입술을 오므리고 포도 씨 같은 것을 뱉듯 그렇게
하는 인사,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인사
나의 웃음도 그렇게 올라타고 싶구나 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날개에 제 날개를 포개는 잠자리 수컷처럼
이제는 동네 슈퍼로 들어가버린 여인, 생각해보라,
술은 술 노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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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대하여 / 이 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너어간다 손이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여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이불 위로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들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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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대하여/이성복
1
어느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를 만든다
밥으로 천국과 유곽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피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고통을 만든다 밥으로 시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즘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밥이 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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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이 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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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엔 흔적이 없다 / 이 성복
누워 있는 네 눈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네 살에 손톱자국을 남긴다
거기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써보거나,
하늘에 없는 별자리를 그려보거나
네 살엔 흔적이 없다 너는 벌써 받아
숨긴 것이다 가만히 손톱으로 네 살을
누르면서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또
몇 점 눈꽃 송이 네 눈으로 내려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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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遲純의 감침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속에 入場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球根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天國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時代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時代의 어리석음과
또 한 時代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마라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故鄕을 버렸다 꿈엔들 네 故鄕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故鄕 대신 물이 흐르고 故鄕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性器 끝에서 왔고 칼끝을 향해 간다
性器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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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 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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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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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넓고 드높아 / 이 성복
밤은 넓고 드높아 수없이 깔린 별들
서로 싸운다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낮게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
이것은 돌아가는 길인가, 오는 길인가
더는 다가설 수 없는 순간에 너를 부른다
네 얼굴을 보여다오,
바늘을 입에 문 물고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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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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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 이 성복
마라,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가로등 불빛에 떠는 희부연 길 위에,
기우는 수평선, 기우뚱거리는 하늘 위에
마라, 네가 어떻게, 왜 여기에,
대낮처럼 환한 갈치잡이 배 불빛, 불빛에
아, 내게 남은 사랑이 있다면
한밤에 네게로 몰려드는 갈치떼,
갈치떼 은빛 지느러미,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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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우리가 헤어진 지 오랜 후에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잊지 않겠지요 오랜 세월 귀먹고 눈멀어도 내 입술은 당신의 입술을 알아보겠지요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우리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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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 이성복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 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놓을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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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속삭이다가。이성복。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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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 이 성복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찰랑이는 채석강 연안 바닷물이
쨍알쨍알 보채는 나를 달랜다
목까지, 눈까지 잠겨 작은 물결
물새떼 흉내를 내는지 물새떼
작은 물결 흉내를 내는지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마냥 발길
떨어지지 않는 나를 달래며 바다는
속이 탄다 검은 오지항아리 속
자글자글 끓는 바다는 나를 달랜다
이러면 어쩌나,낸들 어쩌나
오늘도 난 바다에게 짐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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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 이 성복
바닷가 언덕 위 이름 모를 꽃들,
제 뺨을 잎새에 부비며 어두워진다
발 밑에 제 이름 묻고, 그림자를
묻고, 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꽃들,
눈먼 파도에 시달리다 물거품이 되는
꽃들, 마라, 눈을 떠라, 지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난 시들고 말 거야
아, 이 저녁엔 간지럼처럼 찾아오는
죽음, 베일 아닌 죽음이 따로 있을까
아, 눈시울에 떠는 한 아름의 꽃들,
폭풍 지나가면 곤소금 뒤집어쓰고
허연 뿌리 드러낼 저것들이 오늘
저녁 네게 던지는 빛은 얼마나 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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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性器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移民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먹거나
이차 대전 때 南洋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과 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했을 뿐 아무것도 追憶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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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이었어, 밀쳐낼 수 없는 물결이었어
많이 꼬이고 꼬여 설레이면서
몸을 바꾸고
바뀐 몸 누여 두고
푸른 바람으로 내릴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 헤매는 거리의
지워진 발자국일까
참으로 불편한 잠을
너는 자고 싶었다
그 잠에서 깨일 땐
깃털처럼 가볍게 떠오르고 싶었다
물결이었어
밀쳐낼 수 없는 물결이었어,
네 속삭임도, 형체 없는 네 웃음도 저항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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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 이 성복
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거기, 名山이 大德이 이를 보이며 껄껄 웃고
너울거리는 강과, 강의 엉덩이를 핥는 바다의 넘실거리는
너울을 넘어 그가 나를 부르고,
반갑게 내가 대답하고
그가 나를 불러 낄낄거리는 名山과 大德의
뜨거운 이마를 짚게 하고,
내가 소리쳐 太平歌를 부르고
해가 지면 거기 가서 누울 수도 있으리라
나무들은 검은 둥치를 습기찬 언덕에 비비고
풀숲으로 타닥타닥 겁 많은 벌레들이 튈 때
오, 해가 지면 거기 누워 죽을 수도 있으리라
이 몸, 거친 몸, 이 어이 거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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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1
눈이 온다 더욱 뚜렷해지는 마음의 수레바퀴 자국
아이들은 찍힌 무우처럼 버려져 있고
전봇대는 크리스마스 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이 온다 산등성이 허름한 집들은 白旗(백기)를 날리고
한 떼의 검은 새들, 집을 찾지 못한다
마음의 수레 바퀴 자국에서 들리는 수레 바퀴 소리
이제 같은 하늘 바깥을 떠돌고
亡者(망자)들은 무덤 위로 얼굴을 든다
-치욕이여, 치욕이여 언제 너도 白旗를 날리려나
2
그 겨울 눈은 허벅지까지 쌓였다
窓(창)을 열면 아, 하고 복면한 산들이 솟아 올랐다
잊혀진 祖上(조상)들이 일렬로 걸어왔다
끊임없이 그들은 흰 피를 흘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온 몸에서 전깃줄이 울고, 얼음짱에
아가미를 부딪는 작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쌓였다
나무 십자가가 너무 부족했다
잘못, 시체를 밟을 때마다 나는
가슴 속에 물고기를 그렸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녹아 흘렀다
물고기 뼈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 - 하고 누가 소리 질렀다
또 한 떼의 희생자들이 희생자들 위에 쓰러졌다
사슴 뿔을 단 치욕이 썰매를 끌고 달려갔다
아 - 하고 뒷산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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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디냐고。이성복。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 여기가 어디냐고?
-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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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1
그 뿔과 갑주의 등허리에 흰 눈 뒤집어쓰고
산은 쓰러져 있다 아무도 달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산, 제 굶주림과 성(性)과 광기를
못 이겨 헐떡거리는 산, 홀연히 눈보라 일면
꼭대기 레이더 기지 첨탑은 경련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더 깊이 후벼팠다
2
지금 바라보는 먼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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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이후
나는 당신이 그리 먼데 계신 줄 알았지요 지금 내 살갗
에 마른버짐 피고 열병 돋으니 당신이 가까이 계신 줄 알
겠어요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당신이 조금 빨리 오셨을 뿐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요 당신 손 잡고 멀리 가고 싶지만 한 발
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시고, 한 발짝 물러서면 한
발짝 다가오는 당신, 우리 한몸 되면 나의 사랑 시들줄을
당신은 잘 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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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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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속삭이다가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시집< 아, 입이 없는것들 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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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어떤 하늘이
이 열린 장미의
이 무사무념의 장미꽃 호수 속에서
비추이고 있습니까, 보십시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장미「장미의 숲」
어떻든 예쁘려면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쏙아지가
못돼야 켕기는 것 있고, 켕기는 게 오래되면 화병도 나
고, 화병이 오래 가면 무사무념까지 간다. 여름 대낮에
큰 대(大)자로 누워 침 흘리는 들장미가 아름다울 리 없
다. 쏙아지가 없으니 켕기는 것 없고, 켕기는 것 없으니
화병도 안나고, 화병 안 나니 무사무념도 없다. 어찌든지
예쁘려면 쏙아지가 못됐어야 한다. 바짝 약오른 살모사
의 곧추 세운 모가지처럼, 한겨울 법당에서 살모사 등을
세운 깡마른 비구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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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 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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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성복。
달에는 물로 된 돌이 있는가?
금으로 된 물이 있는가?
-파블로 네루다, 「遊星」
불 끄고 자리에 누우면 달은 머리맡에 있다. 깊은 밤 하늘 호수에는 물이 없고, 엎드려 자다가 고개 든 아이처럼 달의 이마엔 물결무늬 자국. 노를 저을 수 없는 달은 수심 없는 호수를 미끄러져 가고, 불러 세울 수 없는 달의 배를 탈 것도 아닌데 나는 잠들기가 무섭다.
유난히 달 밝은 밤이면 내 딸은 나보고 달보기라 한다. 내 이름이 성복이니까, 별 성 자 별보기라고 고쳐 부르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애 보고 메뚜기라 한다. 기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치면, 영락없이 아파트 12층에 날아든 눈 큰 메뚜기다. 그러면 호호부인은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벼랑의 붉은 꽃 꺾어 달라던 수로부인보다 내 아내 못할 것 없지만, 내게는 고삐 놓아줄 암소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오를 수 없는 벼랑의 붉은 꽃처럼. 절해고도의 섬처럼, 파도 많이 치는 밤에는 섬도 보이지 않는, 절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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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이별 2
아직 그대는 행복하다 괴로움이 그대에게 있으므로 그러나 언젠가 그가 그대를 떠나려 하면 그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해질 것이다 괴로움이 그에게로 옮아갈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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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시집<아,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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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검은 산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은
흘러내린다 옷만 있고 몸뚱이가 없다
마라, 나는 너의 허리를 감는다
살아 있느냐고,살아 있었느냐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눈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하늘 네 눈동자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다 마라,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에서 마지막 영생의 꿈에 붙들리는
것이다 눈먼 바람이 우리를 찢을 때까지
찢기는 그림자를 향해 절하는 것이다
시집<아,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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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이렇게 발 뻗으면 닿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늘 거기 계시니까요
한번 발 뻗어보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마음 먹습니다 당신이 놀라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발 뻗어보지않으면 당신은 또 얼마나 서운해 하실까요
하루에도 몇번씩 발 뻗어보려다 그만두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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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보라
비린내 나는 네 살과
단내 나는 네 숨결 속에서
내숭 떠는 초록의 눈길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초록 잎새들이
배반하는 황톳길에서
생각해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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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1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비 2
머리맡에 계시는 것 같아 깨어보면 바깥에 계십니다
창을 열고 내다보면 빗줄기 너머에 계십니다 지금 빗줄기
사이로 달려가면 나 없는 사이 당신은 내 방에 들어와 뽀
오얗게 한숨이나 짓다가 흐트러진 옷가지랑, 이부자리랑
가지런히 매만지다가 젖어 돌아오는 내 발소리에 귀기울
이는 건가요?
<그 여름의 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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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詩가 詩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天國은 말 속에 갇힘
天國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덧없이> 지리멸렬한 行動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덧없이> 나는 <어느날>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天使가 되는
<어느날>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灰色 담벽
나는 <집요하게>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요하게>
내 詩에는 終止符가 없다
당대의 廢品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젠가 나는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正當性을 밝혀냈고 反復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 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육교 위에
버섯이 자라고 버젓이 비둘기는 수박 껍데기를 핥는가
어째서 맨발로, 진흙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몸빼이 차림의
젊은 여인은 통곡하는가 어째서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의 表現은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이
아닌가 어째서 詩는 貴族的인가 어째서 貴族的이 아닌가
식은 밥, 식은 밥을 깨우지 못하는 호각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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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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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깊은 내륙에 먼 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리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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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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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
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
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
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
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
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
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
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灰層이 깊었다
─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 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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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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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音樂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하게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牧丹이 시든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
당한 소녀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나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를 부를 때,
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韓族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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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길 수 없는 노래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가득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음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
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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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대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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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괴로와하기 전에 기다리고
기다리기 어려울 때
한 번 숨을 끊고 들여다보는 물
너의 깊은 물, 나를 가둔 물
머리 풀듯이 괴로움 풀고
속절없이 한 세상 지나가면
이 물은 다시 흐를 것인가
형벌이여,
민물에 떠밀리는 이끼처럼
지금의 인후咽喉에 남아 있는
최초의 떨림!
시집: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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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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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
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
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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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급出埃及
1
오늘 다 외로와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영화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 속에서 한 편의 영화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 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애인愛人,
나는 퀭한 지하도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동방박사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천국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욕정慾情에 떠는 늙은 자궁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분노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주主여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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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시집:'90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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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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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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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罪)에서 지을 죄(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後光), 너는 썩어 시(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熔岩)처럼 가슴 속을
떠돌아 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不穩)한 도랑을 따라
예감(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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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아름다운 것
1
아침마다 꽃들은 피어났어요
밤새 옆구리가 결리거나
겨드랑이가 쑤시거나
밤새 아픈 것들은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아침엔 손를 뻗쳐
무심코 만져지는 것이
뭔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지요
2
저녁이면 꽃들이 누워 있었어요
이마에 붉은 칠을 하고요
넘어져 다쳤는지 몰라요
어쩌면 더 먼 곳에서 다쳐
이곳까지 와서 쓰러졌는지도
엎드리면 꽃들의 울음소리 들렸어요
난 꽃들이 등물하는 줄만 알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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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서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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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떤 불길한 기운이 네 뇌수에
사랑의 독을 풀었니?
때로 나는 한 마리
체체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하여 넌 내게 미쳤니?
어떤 불길한 기운이 네 뇌수에
사랑의 독을 풀었니?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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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가 벗겨진 벽은/이성복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 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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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이성복
'수그리다'는 말이 '구부리다'는
말의 추억을 가지듯이
고개 숙인 양달개비 푸른 꽃은
어느 깨진 하늘의 사금파리일까
지금 이곳이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는 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양달개비꽃은 푸르고,
이질 설사의 배설물 같은
흰 개망초꽃 사이,
퍼질러 앉은 오십대 여인들의
엉덩이가 유난히 커 보인다
이 세상에 당신은
계 모임 하러 왔던가
ㅡ시집<<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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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댓잎이라면 / 이성복
형은 바다에
눈 오는 거 본 적 있수?
그거 차마 못 봐요, 미쳐요
저리 넓은 바다에
빗방울 하나 앉을 데 없다니
차라리 댓잎이라면 떠돌기라도 하지
형, 백 년 뒤 미친 척하고
한번 와볼까요,
백 년 전 형은 또 어디 있었수?
백 년 전 바다에
백 년 뒤 비가 오고 있었다, 젖은
그의 눈에 내리다 마는 나는 빗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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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3
아침부터 전해오는 새깃보다 가벼운 이 떨림, 나는 목구멍 눈구멍 다 열어놓고 떨림이 가시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기쁨의 시작인가, 불안인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한 마리 수줍은 짐승으로 만드는 떨림, 이윽고 나는 내 옆에서 숨죽이고 있는 짐승들을 다만 내 눈시울로 떨게 한다 멀구나 멀어, 이 떨림이 멎는 곳은 어디인가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5
물 고인 땅에 빗방울은 종기처럼 떨어진다 혼자 있음이 이리 쓰리도록 아파서 몇 번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다 종아리부터 무릎까지 자꾸만 피부병이 번지고 한겨울인데 뜰 앞 고목나무에선 붉은 싹이 폐병환자의 침처럼 돋아난다 어떤 아가씨는 그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견디려면 어떻든 믿어야 한다, 믿어야 한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7
햇빛은 따스하지만 바람은 아직 쌀쌀해서 새들은 자꾸 목을 감춘다 기숙사 담벽 아래 흰 매화꽃들이 검은 가지에 소복이 앉아 미끄러질 듯하고 아까부터 벤치에 앉은 젊은 남녀는 붕어처럼 입을 맞춰댄다 아까부터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아보지만 그건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붙어 있는 위턱과 아래턱 사이의 친화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이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9
집 나온 지 며칠 자꾸 바람이 불어 하늘 한쪽에 집들이 떠다니고, 나도 나무도 팔다리가 따로 놀고 얼굴을 더듬으면 탈일 뿐이다 어디 눈물샘이 있는지 더듬어보지만 울어본 지 오래여서 울 수가 없다 그대 집은 플라스 디탈리, 내 사랑은 바람부는 강을 건너 그대 집에 닿았는가 내게는 바람 외에 다른 살이 없다 꽉 찬 幻化여, 나는 이제 제정신이 들 것만 같다 육십년 후 이맘때 플라스 디탈리 중국집 근처를 떠돌 幻化여, 지금 내가 울면 그대도 따라 울 것인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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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개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했다.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1977년).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등과
시선집 『정든 유곽에서』, 잠언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산문집 『꽃핀 나무의 괴로움』, 문학앨범 『사랑으로 가는 먼 길』 등이 있다.
현재 계명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저서 -
(1992) 네르발 시 연구
(1980)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94) 남해 금산
(1994) 그 여름의 끝
(1993)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2003) 아, 입이 없는 것들
(1996) 정든 유곽에서
삶의 미세한 결을 섬세한 언어로 포착하는 시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은 우리가 일상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놓치고 있는 세상과의 깊은 관계를
'감각의 깊이'로 표현해낸다.
그리하여 우리를, 우리도 모르게, 그 차갑고 아름다운 물결 속에 섞이게 하고,
우리에게 그늘진 세월을 걷어가는 햇빛 같은 눈을 갖도록 일깨운다
그는 개인적인 삶을 통해 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면서
우리를 끈질기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괴롭히는 병든 상태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많은 미발표시들을 포함한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이 같은 우리의 아픔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진실의 추구에서 얻어진 귀중한 소산이다.
『그 여름의 끝』에서 그는 연애시의 어법으로 세상에 대한 보다 깊고 근원적이며 보편적인 이해를,
뛰어난 서정을 통해 새롭게 펼쳐 보여준다.
그의 시 세계는 깊이를 획득한 단순함으로, 나를 버리지 않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나와 타자에 대한 진정성의 사랑의 지난함을 지적·수사적 현란함 없이 평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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