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허망한 나라의 시인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본문
허망한 나라의 시인 진이정
-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한승태(시인)
‘시인의 생애 속에서가 아니라 시인의 영혼 속에서 우리는 시인을 찾을 수 있다.’ 페데르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이 말을 단서로 우리는 진이정 시인을 찾아보자. 일단 그를 찾기 위해서 그의 구체적인 아트만이 시를 쓰며 살았던 1990년대를 돌아보자. 그때는 어떤 시대였던가? 그가 그렇게 못견뎌하던 시대, 그 불화의 흔적으로 남긴 시인의 영혼의 흔적을 찾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자.
알다시피 1990년대는 독재 권력과 싸움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반영하고, 세계적으로 소련의 붕괴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으로 혼란을 시작한다. 치열하던 장수들은 싸울 상대를 잃은 것처럼 칼을 던지고, 전원으로 돌아가거나,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물결이 사람들의 사이마다 날카롭게 할퀴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민주주의도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괴물에 의해 성취되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드러내는 시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장정일과 진이정 같은 시인들이었다.
우선 1987년 치열하던 민주화 시대에 던진 장정일의 <햄버거에 관한 명상>은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참 후에나 밝혀진다. 징후로서의 그 시대를 증언하는 장정일의 촉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먼저 장정일의 시 하나를 살펴보자.
(....)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장정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부분
이 시는 장정일의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 첫 번째 시로 실린 작품이다. 이 시는 시집의 은유의 문을 여는데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은 또는 화자는 히브리 노예들이 바빌론에 끌려가 살았던 시절을 얘기한다. 따라서 당대를 노예의 상황으로 병치한다. 시장자본주의 노예로 살아가는 물신화의 군상들을 이 시집은 여기저기 배치해 놓고 우리들은 종교와 결합된 자본의 노예나 다름없다고 전제한다.
1980년대 우리가 한참 민주주의에 목말라할 때, 장정일은 1970년대 산업사회 속에서 온갖 노동을 하며 민주화의 이면에, 그리고 그 이후에 전개될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우려와 불안을 잘 포착해 낸다. 시간으로부터, 현재의 절망으로부터 항상 도망 중인 사람들. 신은 소외되고 신앙만 남은 교회와 자본의 유착. 무엇이든 상품으로 판매하는 백화점 왕국의 구매자로 살아생전 온갖 상품의 구매자였던 우리는 죽어 비로소 영원한 구매자가 된다. 텅 빈 껍질만 남은 삶, 주체적인 나의 삶이 아닌 배우와 영화의 배역처럼 대리만족하며 사는 삶, 죽어서도 자본의 노예로 낙인찍힌 삶을 그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시들은 당대에 불온하게 여겨졌지만 그만큼 예리한 예언적 징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시는 성경의 신화를 차용하여, 매우 신화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백화점을 지배하는 자가 군대를 지배하리라’는 것처럼 자본에 의해 물신화된 신화를 그는 쓴 셈이다.
1987년, 처음 그의 시집을 접하면서 그가 왜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 그의 시집에 발문을 써주었던 이윤택 시인도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뭔가 있구나, 하는 정도의 발문을 썼다.
그의 시를 이해한 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무렵으로, 구체적으로 물신화되는 아트만을 느낄 수 있었다. 순진하게도 1980년대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취했을 때, 민주화를 부르짖던 어느 선배는, 어느 날 피라미드에서 자신의 조직 후배들을 황금의 사다리로 꾀고 있었다. 그래서 알았다 실제로 승리한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 나라의 자본가들이었다는 걸....... 그때는 그걸 몰랐던 것이다.
시의 주인공처럼 나도 참 그랬으면 좋겠다. 실직의, 일생의 고통을 아물게 해줄 그런 나무 아래서 단잠을 자고 싶다. 누구나 삶에 지쳐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바빌론 강가에 앉든, 소양강가에 앉든, 그런 신화적인 나무 아래 쉬고 싶다. 이제 시간과 자본의 노예가 된 우리들, 휴식이 소원이 돼버린 현실 앞에 우리는 지쳐가고 있다.
진이정과 장정일의 시가 어떻게 연결될까. 내가 생각하기엔 그들의 시가 앞으로 전개될, 혹은 숨은 신 같은 자본주의 예후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꿰뚫고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선 그의 시집 제목이면서 연작시의 제목인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삶의 가치가 전도된 세상에서 가치가 전도되기 전을 위한 꿈일까, 아니면 아트만이 비루먹게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꿈일까? 아마도 이것에 대한 힌트는 그의 시에 내재된 현실인식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
- 진이정, 「시인」 전문
시대마다 그 시대를 특정 하는 주요 질병이 있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다. 냉전도 역시 이러한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징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병철은 진단한다. 마찬가지로 진이정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가면서 이러한 징후를 읽어내고, 그에 대한 온몸의 반응을 시로 옮긴 것인 아닌가 한다.
1994년 그는 메일주소 형식의 시쓰기를 세 편의 시에서 선보인다. 「새벽 세시의 냉장고」, 「환상, 굿 이야기」, 「헤비메탈 같은 비」가 그것이다. 메일 주소의 앞은 타인과 구분되기 위한 존재 증명 같은 것이고 뒷부분은 공통의 소속을 나타내는 집단의 주소 혹은 국가 같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나를 규정하는 집단 혹은 국가는 어떤 관계인가?
(....)
@
여전히 나는 구두쇠이다
여전히 사방은 캄캄하다
누구라도 문을 열어
이제 확실히 말해다오
내가 사는 이곳은
사랑의 북극인가 남극인가
나는 감정의 펭귄인가 에스키모인가
- 진이정, 「새벽 세시의 냉장고」 부분
‘식욕을 극복하는 자가 성인이 되리라’ 나의 식욕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 나의 식욕을 위해 ‘오존층에 구멍이 생기’고, 나의 식욕을 위해 닭들이 좁은 닭장에서 죽어가고, 나의 식욕을 위해 벌들이 죽어가고, 결국은 나도 사방이 캄캄한 냉장고 칸 같은 무덤 속에 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방식은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래서 ‘헛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진정한 삶인가? 죽음인가? 그래도 나는 결코 반성하지도 바뀌지도 않는다.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합리화한다. 나의 식욕이 나를 규정한다.
그가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는 그의 선의를 믿기로 하고 그의 현실감을 밀고나가자면, 그의 시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같은 혼란스런 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당대 사회에 대한 징후로써 21세기의 증언이 아닐까? 민주주의의 쟁취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야유 같은 건 아닐까. 그렇다고 그의 모든 시가 혼란스럽지는 않다. 흡사 그의 시는 굿당에서 신내림 받은 무당의 방언 같다. 유난히 그의 시에 인류의 각종 종교가 등장하는 것도 자본주의 사회의 징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신은 사라지고 신앙만 남아서 변죽을 올리며, 자본교로 변해가는 당대와 앞으로의 징후를 그는 온몸으로, 죽음을 들이받으며 드러낸 건 아닐까? 미국을 무작정 추종하는 자본의 권력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고 분리시킴으로써 작동된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 그는 선언하는 듯하다.
아무나 따라가진 않으리 하지만 무작정 거리로 나선다 어느새 대로변의 장의사가 보신탕처럼
으슥한 골목으로 쫓겨 와 있다 죽음의 출장소와 시민들이 일상으로 조우하는 일, 관리들은 몹시도
혐오하는 모양, (.....)
원왕생 호메이니 옹이시여, 이태원 쇠귀신 물리치던 한남동 모스크 코란 독경, 관리들은 참말 저어한다
아예 원천봉쇄, 죽음을 말이다! 시민들이 동요하기 쉬운 -5월에는- 더더욱 안절부절 못한다
그 안절과 부절 못함을 아마 관료주의라 하는 것일 터(....)
아메리카 여군이 벗어던진 브래지어, 일회용 개짐, 키스 후의 추잉껌, 낙타누깔, 칙칙이, 콘돔이라는 이름의 애드벌룬(자신의 출생 여부를 내려다보는 기구 안의 벌레들이여)
고귀한 시절은 지났다 아버지 진리는 천박함에게만 고도의 살상무기를 선사했다
진리는 죽었다(...)
- 진이정, 「영동산보-진리는 죽었다」 부분
(...)
ㄴ
왠지 새벽은 삶과 가까울 거라 여겨진다 하루 중 가장 오염이 심한 신새벽의 찬 공기를 생명력의 원천으로 깊숙이 들이마시는 도회지 건강족들의 허파꽈리여
(...)
ㄹ
자는 것은 삶일까 죽음일까 또한 꿈은? (대체 꿈은 뉘 역성을 드는지) 자고 일어나면 전날 밤보단 좀 젊어진다 하던데... 그럼 죽음이란 돌이킬 수 없도록 다시 어려지는 일인가
(...)
- 진이정, 「케이크 위에 <축 생일>」(≪문학정신≫ 1991년 10월호) 부분
성령이 깃든 사람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와 열정으로 한없이 계속 떠들어댄다. 자본주의도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음악 산업을 통해 계속 수다를 떤다. 순수증여를 하는 힘과의 경계에서 이런 증식현상이 일어나고, 계속 수다를 떨어대는 상품은 자칫하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황폐하게 만든다.
열네 살의 새벽까지 나는 창녀란 말을 몰랐다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정착해서야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간파했다 돌연 멀리 있는 동무들이 낯설어지누나 간장 달이는 내음이 짭조롭던 그곳의 너덜한 그림책으로 난 예수의 일생을 배워야 했는데,(....)정든 갈보들의 펑퍼짐한 꿈들은 본토에 잘 안착했는지 지미랄 카터의 동정에 울고 웃던 가게 주인들 틈에서 짜장면 젓는 폼만 보아도 양갈보 똥갈보를 용케 구분하던 양민들 속에서 나는 그 옛날의 진창이 그리웠다 비록 연꽃으로 피어나진 못했더라도, 아아 이 몸은 그 진창의 아들일 터이니...
- 진이정, 「진창」 부분
유년시절 춘천의 미군부대를 통해 알게 된 세계 권력을 추억함으로써 그는 이런 메시지를 알게 되고, 당대의 군부정권의 미친 짓(3S정책)과 권력욕을 풍자하기 위한 전략으로 “거꾸로 선 세상, 거꾸로 선 꿈”을 세운 것은 아닐까?
내가 내 사골국을 훌훌 들이마시며 크어, 시원타-
하는 건지 내가 내 살점 저며 가며 횟집 번성시키는 건지 그래(....)
조주는 어째 유라 했는고(너무 뻐언해용!)
- 진이정, 「시인을 위한 윤회강좌」 부분
그의 말대로 자기 생을 소비하며 죽음을 들이 박는 그의 시는 뻔한 것일까?
아버지, 알고 보니 제가 주였나이다. 나의 십자가는 정전되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가스와 기름과 향로로 만들어졌나이다(...)
할아버지도 그 소녀 의식의 그림자이다
그림자와 의식은 동일하니?(....)
아버지, 제가 주였나이다; 제 십자가 때문에 열대 우림이 잘리고 있어요(....)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부분
편견이 곧 나다; 나를 버리기란...
그를 쫒아주세요 외국 군대엔 언제까지 의지해야 하나
(...)
미끼라도 물고 싶어
(...)
절망 아니면 희망이겠지; 변해 가는 건 변해 가라지
(....)
너는 보는 즉시 추억으로 화했다
(....)
내 풀무 허파, 불난 내 몸 부채질하네
(....)
몽정의 나날이야, 꿈의 정액이여; 어디 마땅한 질을 찾아가거라
(.....)
마음 내킬 때마다의 선행으로 구원되리라 믿진 않는다
(......)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2」 부분
모오든 진리는 현상유지를 원한다
악어의 눈물과 복사꽃의 폭탄, 상처만이 리얼해
예외를 바라는 건 나만의 고유한 심리다; 나라는 존재는 너무 흔해
(....)
활자가 영혼을 피폐하게 한다; 신문, 잡지, 경전의 순으로
미안해 나는 언론기관의 주주다
(....)
인간의 마음에 바이러스가 서식하므로
하느님은 영원한 해커다
(....)
내가 쓰는 말이 표준말이야(내가 권력이야)
(...)
바빌론의 강가에서 나는 돈을 센다
(...)
기계로 쓴 시를 읽는 사람들,
뜬소문처럼 우주에 떠 있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3>중에서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
미국의 별 아래 우리는 산다라는 생각
(....)
어찌 하여, 너는 하여가를 부르느냐
(...)
나를 위로해 다오, 커피 한 잔의 식곤이여,
(...)
나는 구호 식품에 의존해 있으므로, 시인이다
(....)
고구려 병사가 나의 국적을 물었다
전 허망한 나라에서 왔습니다요,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4」 부분
난 성실하게 꿈을 꾸어왔지
우린 꿈과 같이 있기만 해도 스캔들이 났던 거야
(....)
여름밤에 인생을 토해 버렸다, 나는 뭔가를 맛보긴 한 것이다
(...)
난 모든 종류의 우상화에 반대하노라, 제석천의 우상화조차
(...)
나는 경전에 찌들어 있어
도시 게릴라전을 익히느라, 이십대를 보냈다
내가 수호해야 할 도시는 날건달로 방치했다
한참을 나는 숨죽이고 있었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민족반역자들이 출세한다, 나는 화장실에서 씩 웃었다
(....)
나는 여태까지 참기만 해 왔어
그게 인생이란다; 개 같은
(...)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5」 부분
왜 꿈에서는 착한 일을 하기가 그토록 힘이 들지
(...)
조국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
피를 뻘뻘 흘리며 나는 시를 쓴다, 나 돈 줘
돈푼깨나 만졌다면, 고호의 귀는 멀쩡했으리라
난 지금 어금니라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고도 시인이다 또는 그러니까 시인이다
(...)
육신이 멀쩡한데도, 도무지 쓸 데가 없다
(...)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6」 부분
예술은 의도되지 않는다
의도의 궤도를 벗어난다고 예술이 되는 것도 아냐
(...)
호심탐탐, 몸을 버릴 기회를 노리노라
내 인생은 엇박으로 돌아가고 있다
(...)
광신이란 진리의 금단현상이야
(...)
연애의 진미는 함께 공포의 지뢰밭을 걷는 데 있어
결혼식장의 그들은 상이용사처럼 쓸쓸했다
관혼상제의 그물만 피할 수 있다면, 결코 죽지 않으리라
(...)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7」 부분
사리자야, 물질이 정말 실체가 없는 거니?
텅 빈 상태가 정말 나야?
정말 그렇다구? 이거 큰일이구나
진리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
용산의 기지 안을 거닐고 싶어
나의 고향은 거기야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8」 부분
달걀 속에서 꿈틀대는 황금 거위의 외로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원했다
(...)
허전해, 허무해, 허망해,
내 마음의 세 허 씨가 날 괴롭힌다
금강산 참회하나이다, 지리산 참회하나이다,
나는 경전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경전 앞에서 나는 숨이 가쁘다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9」 부분
농촌 총각과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시 총각인 것이다
온 세상의 처녀들이 두려워하는 시 총각!
나는 처녀를 데려올 만한 식민지가 없다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0」 부분
그의 꿈은 뒤죽박죽이다. 그러니까 꿈이다. 삶도 뒤죽박죽이다. 그러니까 삶이다. 언제 인생이 논리정연했던가.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어린시절 세례 받은 “성령 없는 종교”, “미국 기독교=세계 권력”이란 등식이 변주된다. 그래서 반도에 남겨진 혼혈아 같은 시인은 가해자면서 피해자인,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세상을 그려낸다. 그의 시는 권력과 자본이 한 몸이고, 그게 바로 나이면서 너이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변주와 변설로 이루어졌다.
그의 사라져가는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기억과 추억인데, 그 추억의 기둥이 되고 있는 것이, 유년시절 춘천의 기지촌에서의 경험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사랑이면서 상처이고, 상처이면서 사랑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이분법적인 타자를 구분하는 구도보다는 범아일여처럼 일원론적 세계로 구축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소비, 탕진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통해 우파니샤드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가 왜? 세상의 모든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걸까?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샤먼의 자세를 보인다. 샤머니즘의 세계에서는 유일신이 아닌 위계질서를 가진 만신전의 우파니샤드다. 만신은 결국 하나인 신의 여러 모습의 현신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시가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다루는 욕망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데, 성욕과 식욕과 권력욕은 서로 이름이 다르지만 하나의 얼굴을 한 키르티무카인 것이다. 그래서 성욕을 얘기하다 식욕을 얘기하고 식욕을 애기하다 권력을 얘기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인간 욕망의 문제를 종교라는 틀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종교들이 다른 신을 모시고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샤먼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화해시키는 자이다. 그의 시는 자신에게 점점 현실이 되는 죽음을 삶과 화해시키려는 무당의 넋두리이기도 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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