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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이승호_늙은 조르바를 만나다

바람분교장 2016. 12. 20. 13:45

늙은 조르바를 만나다

 

이승호

 

뜨거운 날들의 다음날을

나는 알고 있지

목숨을 연명하자면 낭만주의자가 되어야 해

신문 따위는 읽지 말고

드라마에 빠져

내일을 기약하며 고스란히 늙어야지

도통한 척

생의 속도에 맞춰

산책하는 사람들처럼

인류가 자신의 연인으로 선택한 변함없는 시간들을

음악으로 바꿀 줄 안다면

굳이 사랑을 발명하지 않아도 돼

천체의 운행이 너를 책임져 줄 테니까

강줄기를 넘어가고

넘어오는 새들처럼

바람에 쓸리는 낙엽들조차 생의 기쁨이 있다고

이제 내 노래를 들려주랴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그토록 인간이 되려고 애쓰고 있지

 

 

이승호 시집 <행복에 바친 숱한 거짓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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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삶이 진창이었다고 느낄 때는 이미 진창을 빠져나온 뒤이거나 죽을 때이다. 보통 나이 들면 자신을 회고하고나 성찰한다. 하지만 삶 그 자체가 진창이란 걸 긍정하고 진창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으로 남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후자의 사람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린다. 온 생애가 한순간이듯이 격렬하게 즐기는 삶의 자세는 아마도 햇살이 강렬한 그리스의 자연환경에 기인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리라. 거기에 우리는 문명이라는 교양이라는 겉옷을 더께더께 껴입고 살아간다. 그럴수록 두꺼운 옷 속의 몸피는 더욱 왜소화 되어 난쟁이가 되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그 자체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살기 위해 몸에 뒤집어쓴 외투를 끊임없이 벗어던져야 비로소 태어날 때의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음악에 몸을 맡기고 생의 리듬에 맞춰 늙어갔던 조르바를 생각하면서 난 니체의 난쟁이를 떠올린다. (한승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