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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한승태 / 한없이 투명한

바람분교장 2020. 8. 5. 09:15

한없이 투명한

 

 

 

그러니까 어느 날부터였는지

나는 한없이 투명해졌나보다

딸은 일찍 들어온 나를 보고

더 이상 놀라지 않고 집에 들어온 내게

아내는 말을 걸지 않는다

딸과 아내는 내 앞에서

지난 얘기처럼 내 얘기를 하고

말을 걸어도 돌아보거나 대답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 거다 내가 한 약속처럼

딸과 아내의 다정한 대화를 들어보면

내 얘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참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한때 불 켜지면 숨는 바퀴벌레처럼

이제 더 이상 숨지 않는다

이봐, 밥 줘야지!

집달리가 집안의 가재도구를 빼앗아가듯

내가 아끼던 시계도 사라졌다

내 양말 어디 있어?

답이 없다 냄새도 없다

한없이 투명하다

 

한승태 시집 <사소한 구원> 중에서

 


세상에는 이런 아버지들이 너무 많다. 나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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