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한승태 / 한없이 투명한 본문
한없이 투명한
그러니까 어느 날부터였는지
나는 한없이 투명해졌나보다
딸은 일찍 들어온 나를 보고
더 이상 놀라지 않고 집에 들어온 내게
아내는 말을 걸지 않는다
딸과 아내는 내 앞에서
지난 얘기처럼 내 얘기를 하고
말을 걸어도 돌아보거나 대답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 거다 내가 한 약속처럼
딸과 아내의 다정한 대화를 들어보면
내 얘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참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한때 불 켜지면 숨는 바퀴벌레처럼
이제 더 이상 숨지 않는다
이봐, 밥 줘야지!
집달리가 집안의 가재도구를 빼앗아가듯
내가 아끼던 시계도 사라졌다
내 양말 어디 있어?
답이 없다 냄새도 없다
한없이 투명하다
한승태 시집 <사소한 구원> 중에서
세상에는 이런 아버지들이 너무 많다. 나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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