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 (181)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편자 신은 연애 장석남 겨울 나무여 내 발등을 한번 짛어볼래? 달빛아내 광대뼈을 한번 후려쳐볼래? 흐르다 멈춰버린 얼음장아 내 손톱을 한번 뽑아볼래?사랑아 낮에 켜진 가로등을 찾아내볼래? 기어코? 저녁이 되자 길가의 소나무들이 어두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조상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 어쨌다는 거야? 하고 묻노라면 재빨리 이번엔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해주었다던 여인 이야기를 금방 돋는 별빛들도 좀 섞어 말한다 말한다 여전히 어두운 이야기지만 말한다.... 잊을 만하면 으르렁 으르렁대는 한밤의 보일러 소리 -----------------------------------------------편자를 신은 당나귀가 아닌 사랑이면 얼마나 불편할까. 편자는 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일을 시키기 위해 덧씌운 신발 같..
三월이 오고 장석남 3월이 오고 또저녁이 오네열두 겹으로 사랑이 오네물 이랑이 밀고 오는 것,물 이랑이 이 강안을 밀어서 내 앉은 자리를 밀어서 나를 제 어깨에 초록으로 앉히고는 밀어서 가는데불이 한 점이 켜지고 또 꺼지고목련이 정수리에서부터 피어 내려오는데처음의 서늘한 입맞춤이 조금씩더워지고 더워지고3월이 오고 꽃밭마다꽃이 와 앉고잎이 솟고 솟고열두 겹 사랑이 오네조금 더 작아져서 살아갈 일을우리는 이마에 물들이네초록 이마로 물들이네 ------------------------------------겨울 지나 봄이 막 가져오는 것들은 꽃이고 생명이고 사랑이다. 흔한 비유이다. 중요한 건 그 흔한 얘기를 거창하게 했다면 아마도 뭐 그렇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라, 흔들리지 않는 듯, 희미한 햇볕의 온기..
생활세계에서 춘천가기 이장욱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진리와 형이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활세계에서 춘천을 갔네. 초중등학교 때는 우주의 신비와 시를 배웠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는데 또 독재자를 뽑았구나. 춘천에는 호수가 있고 산이 있고 깨끗한 길이 있지. 여..
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
들판의 트레일러 / 김개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나는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들판을 가지게 되겠지 풀이 마르는 냄새가 옷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스밀 거야 당신과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냄새야 당신은 트레일러에서 빛을 끄고 녹슬어가다 하루에 한 번씩 새로운 연장으로 태어날 거야 당신은 끽끽거리는 트레일러를 흔들며 요리를 하고 고장난 줄도 모르는 나를 오전 내내 수리해 나는 차돌 같은 당신의 희고 큰 치아 밑에서 펴지고 잘라지고 조여지면서 점점 쓸모 있어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독초와 뱀과 바위가 많았으면 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좋아 그런 곳일수록 진귀한 풀과 나무와 꽃이 가득하니까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 좋아..
산책 돌아와서 보니 사람이 있다. 어디서 본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 있고 움직이다가 안 움직이기도 하니까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물 한잔 드려요. 물어본다. 꺾어온 장미를 화병에 꽂으며 아까 소릴 들었죠. 문이 쾅하고 닫혀서 깜짝 놀랐잖아요. 뒤돌아보면 사람이 있고 바람이 불..
땅 끝에서 아직도 너에게선 긴 긴바람이 불고꿈자리마다 쉼 없이 나부끼는해초 같은 머리칼눈감아 지나버린 그날의 네 손밀물처럼 다시 잡았다썰물처럼 놓으며나는 더 이상나를 죽이지 않기로 했다 아직 살아 파닥거리는 기억을 물고 날아가는 갈매기 고통의 지층을 파도에게 보이고 선..
쉰 조현석 1 배낭 꾸렸다 되도록 아주 가볍게 걸을수록 거듭거듭 산비탈만 나타났다 마음이 불편하면 몸이 알아서 미끄러지고 몸이 불편하면 마음이 알아서 미끄러져주고 허구한 날 늘 미끄러졌던 기억들, 이젠 정겹다 2 어스름 속에 산 아래 불빛 어느 것이든 따뜻하지 않을까 핑! 눈물이..
저녁강 함순례 살이 그리워 네 말을 들은 듯 살구가 떨어졌다 살구나무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툭 떨어지는 향기 살고 싶어 싸웠는데 죽지 못해 갈라섰는데 문득 그런 때가 있다고 전화기 너머 가라앉는 목소리가 강물을 적신다 너의 강가에 앉은 나도 억새 물결이다 지금 여기에 없..
키친 가든 함성호 네 자 다섯 자의 조그만 정원 단풍나무와 콩배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고 낮은 담을 둘러 아침 햇살을 들여놓은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자라는 키친 가든에서 오이를 다듬고, 팬을 달구고 데치고, 간을 맞추고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는 키친 가든에서 아욱이 자라고 대파가 통통해지고 감자에 싹이나고 부추가 삐죽해질 동안 딸기가 익어가는 동안 콩과 시금치가 맛이 드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끓는 소리, 찧는 소리, 씻는 소리 스-윽 베는 소리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는 동안 키친 가든에서 이윽고 우리가 심은 씨앗들이, 모르는 동안이, 샐러드가 되고, 파강회가 되고, 수프가 되고, 무침이 되었을 때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허브가 말했다 "누구와, 가 아닌 음식은 쓰레기지" 감자와 딸기와 부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