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 (185)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개싸움 이상국 나는 감춘 것도 별로 없고 그냥 사는 게 일인 사람인데 동네 철대문집 개는 내 발소리만 들어도 짖는다. 산책 갈 때도 그 집 대문에서 되도록 멀리 근신하며 지난가지만 매번 이제 됐다 싶은 지점에서 그가 담벼락을 무너뜨릴 듯 짖어대기 시작하면 뭔가 또 들킨 것처럼 가슴이 덜컹한다. 나는 쓰레기도 철저히 가려서 내다 버리고 적십자회비도 제때 내며 법대로 사는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그는 내 속의 누군가를 아는 것 같다. 그깟 개를 상대로 분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겁을 먹은 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이 개든 무엇이든 내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언짢은 일이다. ---------------------------- 내 안을 꼭 들킨 거 같은 기분은 아무래도 좀 조심스럽다. 우리가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
달맞이꽃 한 아이가 돌을 던져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이홍섭 시집, 《숨결》 사춘기 아이가 좋아하던 이는 누구였을까? 제목이 달맞이꽃인걸로 보아 한밤 중에 무엇인가를 본듯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말을 건넸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두려워 편지를 전하고 돌아서 냅다 뛰던 것도 같은 마음 같기도 하다. 이제 다시 달밤에 피어나는 꽃을 본다. 나는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을까? (한승태)
再 活 8 - 저수지 고여 있음으로 빛나는 물은 저수지뿐이다. 젖통이 열 개인 돼지가 새끼 열두 마리를 낳았다. 계산상으로는 두 마리가 굶어죽어야 하는데, 열두 마리 모두 살아간다. 에미가 양보를 모르는 새끼들을 떠밀어 골고루 먹이는 것이리라. 빛나는 물도 썩을 줄 안다. 고여 있음으로 썩을 수 있는, 썩어가는 바닥에서 부글거리는 애벌레, 언젠가 진흙바닥으로부터 솟아올라 날개를 푸드득이며 날아오르려는 애벌레의 생. 박기동 시집, 〈나는 아직도〉 중에서 부활은 저수지의 생태와 새끼 낳은 돼지를 병치로 보여준다. 저수지는 물을 가둬 담아놓은 곳이다. 저수지의 물은 농사에 쓰일 물이다. 고이면 썩는다는 경구를 비틀어 오히려 썩어서 빛나는 생을 얘기한다. 그 썩은 곳에서 알을 까고 나오는 애벌레, 날아오르는 애..
A와 나 이승훈 A는 고통이다. A가 증대하면서 지상을 가득히 채운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A는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밤이다. A와 나는 관계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새벽에. A와 나는 어떻게 결혼을 취소할 것인가 대낮에. 나는 A를 없애려 권총을 만든다. 물론 나의 권총에는 총구가 없다. 죽여야 할 놈은 이미 시체이기 때문이다. 죽여야 할 놈은 바로 나 아아 시체여 시체여 시체여. 밤에도 낮에도 지상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A는 결코 죽을 가능성이라곤 없다. A는 고통, 나는 고통의 남편, 어떻게 이혼할 것인가. 이승훈 시집 일지사, 1976 중에서 이승훈 시인은 스스로 시론을 가지고 시 행로를 정확히 밝혀 놓았기에 그의 시가 어..
낮과 밤의 발걸음 최승호 내가 나무 말 열두 마리를 끌고 가는 것이 삶이라면 나무 말 열두 마리가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죽음이다 최승호 시집 중에서 은 최승호의 시에서 꽤 난해하다고 알려졌다. 난해보다 대략의 의미는 유추되어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우선 시에는 드러나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 낮과 밤, 그리고 발걸음, 나무 말, 열두 마리, 삶과 죽음 정도다. 낮과 밤이니 시간과 연관이 있을 거 같고, 발걸음이 시간이나 세월 정도거나 그걸 사람으로 연장하면 인생 정도로 해석될 거 같다. 그러니 제목을 인생으로 상정하고 풀어보자, 그럼 본문에서 나는 나무 말 열두 마리를 끌고 가거나 끌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끌고 가는 능동적인 것이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삶이라는 얘기다...
앵두꽃을 찾아서 앵두꽃을 보러 나, 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갔으나 산은 또한 나뭇잎들의 시퍼런 고독을 보여주고는 이파리에 듣는 빗방울들의 서늘한 비가를 들려주었네 남악에서 들려오는 비가를 들으며 나, 또 다시 앵두꽃이 피는 항산을 찾아 떠났으나 내 발걸음 비장했음은, 내 마음 속으로 이미 떨어져 휘날리는 꽃잎의 숫자 많았음에랴 그리고 나, 문지방에 앉아 문득문득 앵두꽃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보지 않은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아름다운 구석을 떠올리겠지만 앵두..
엄마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행상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산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거랑 입을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김종삼_ 「엄마」 전문 우리가 기도하고 원망하는 신은 어디 있나? 우리가 갈구하는 신은 가장 낮은 계단이면서 가장 높이 오르는 계단일 터이다. 죽지 않는 계단이라기 보다 죽을 수 없는 계단일지 모르겠다. 나를 먹여 살리고 키운 건 8할이 엄마다. 내가 파먹은 무덤도 엄마다. 툭툭 던져진 조각 이미지만으로 거대 서사를 만드는 그가 좋다.
강원도 출신이거나 강원도에 살고 있는 시인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원도 시인의 정서를 들여다보면 나의 정서도 보입니다. 이 번 연재를 이렇게 시작해 봅니다. 한 번에 보낼 때, 4편씩 보내드릴게요. 떨어지기 전에 독촉을 해주세요. 한승태 / 내린천에서 태어나 시집 외 2권이 있고 애니메이션 평론집가 있다. 춘천에서 조용히 시 쓰는 사람이다. 일신상의 비밀 또 겨드랑이가 가렵다 침울한 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긁어보지만 참을 수 없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숙연한 영업실적 보고회의 감원을 해야 한다고 사장은 딱딱거리는데 문제는 내 겨드랑이다 삐죽 날개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옷을 벗을 때마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아내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개는 점점 자란다 조심해야 한다 내눈은 점..
參禮店房小似蝸 삼례 객방은 달팽이집 같아 작은데 更深獨座(別)燈花 밤 깊도록 홀로 앉아 등잔불 돋우네. 脩程暗暗長排日 긴긴 날 날마다 쉬지 않고 걸어 / 아스라이 먼 길에 해도 날마다 걸어 魂夢營營幾到家 꿈속에 아등바등 몇 번이나 집에 갔던가. 千里回還空喫苦 천리길 돌아오니 숱한 고생은 부질없고 三冬課業譞(誇)抛他 한 겨울 학업은 공연히 버려두었네. 人生一步皆關命 인생은 걸음마다 모두 운명이거늘 何必長吁復短嗟 길고 짧게 탄식한들 무엇하겠나. 호행록(湖行錄) / 전광훈(田光勳) 중에서 1774년 / 20x17cm / 39장 1책 / 전광훈 친필본 이 책은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전광훈(1722~1776)이 1774년경에 쓴 친필 시문집으로 미간행본이다. 그는 담양(潭陽)인으로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