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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본문

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바람분교장 2011. 6. 29. 22:23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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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있으면 보니 엠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인데요. 80년대 한참 디스코텍에서 많이 틀어주던 노래입니다. 그땐 그 노래가 노예의 노래인지, 기독교도의 노래인지 잘 모르고, 거기에 실린 은유를 모르고 그냥 따라 부르고, 그냥 몸을 흔들었지요. 

    저도 참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실직의, 일생의 고통을 아물게 해줄 그런 나무 아래서 단잠을 자고 싶습니다. 누구나 삶에 지쳐 그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바빌론 강가에 앉던, 소양강가에 앉던, 그런 신화적인 나무 아래 쉬고 싶습니다. 이제 시간과 자본의 노예가 된 우리들, 휴식이 소원이 되버린 현실 앞에 우리는 지쳐가고 있지요.

    장정일의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에 첫번 째 시로 이 작품이 실렸는데요. 이 시는 시집의 은유의 문을 여는데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시장자본주의 노예로 살아가는 물신화의 군상들을 이 시집은 여기저기 배치해 놓고 우리들은 자본의 노예나 다름없다고 전제합니다. 

    1980년대 중반 우리가 한참 민주주의에 목말라할 때, 장정일은 민주화의 이면에, 그리고 그 이후에 전개될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우려와 불안을 잘 포착해냅니다. 시간으로부터, 현재의 절망으로부터 항상 도망 중인 우리들, 신은 소외되고 신앙만 남은 교회와 자본의 유착을,  무엇이든 상품으로 판매하는 백화점 왕국의 구매자로 살아생전 온갖 상품의 구매자였던 우리는 죽어 비로소 영원한 구매자가 되는, 텅빈 껍질만 남은  삶, 주체적인 나의 삶이 아닌 배우와 영화의 배역처럼 대리만족하며 사는 삶, 죽어서도 자본의 노예로 낙인 찍힌 삶을 그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의 시들은 당대에 불온하게 여겨졌습니다만 그만큼 예리한 예언적 징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성경의 신화를 차용하여, 매우 신화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데요, '백화점을 지배하는 자가 군대를 지배하리라,는 것처럼요. 자본에 의해 물신화된 신화를 그는 쓰고 있는 셈이지요.

    저는 처음 87년 그의 시집을 접하면서 이 시집이 왜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더랬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 그의 시집에 발문을 써주었던 이윤택 시인도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뭔가 있구나, 하는 정도의 발문을 썼더군요.

     그의 시집을 이해 한 건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며였습니다. 제가 순진하게도 80년대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취했을 때, 민주화를 부르짖던 어느 선배는, 어느 날 피라미드에서 자신의 조직 후배들을 황금의 사다리로 꼬시더군요.

   실제로 승리한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 나라의 자본가들이었다는 걸.......그때는 제가 몰랐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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