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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사치奢侈 낮잠 자고 일요일 오후를 빈둥거렸다 초등생 딸이 요리책 펴고 반죽을 주무르자 서서히 노을은 창으로 들어와 거실에 가득 찼다 책을 뒤적이고 채널을 돌리다 음악을 바꾸고 저녁 곁을 지키며 나는 괜히 서성거렸다 일주일을 한 달을 무엇을 바라 달려왔던가 기억해주지 않는 ..
잠에 들다 세상 소리 다 듣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의 촛불 유리창마다 그 여리고 긴 손가락들 걱정이란 걱정 몸에 다 들이고 오히려 중심은 텅 비어 아스팔트에서 피뢰침 너머 구름까지 소리를 울려 하늘을 둥글게 감싸 안는 범종 오랜 예언 끝에 서서히 움직이는 당신 물방울 오시네 호령..
탑골 공원 근대가 남긴 최초의 고아라지 파고다 공원이 들어서고도 백년쯤 日光이 만세 하듯 급하게 지구를 돌리고 맥고모자에 양복이 낯설었던 팔각정 울분도 볕도 간데없고 햇살만 남아 거대한 유리관 속 원각사 탑 주인 잃은 종처럼 넋 놓고 서서 아름다운 기와집이 있고 옥신(屋身)에..
와우(蝸牛) 일 만년의 시간을 끌고 나와 충분히 미련할 줄 알고 대지의 연한 입술만 더듬는 그를 때를 기다려 밭가는 맨발의 황소 라고 부르자, 농경민족의 기억 속에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햇살가시나무처럼 바람의 워낭소리 낭자하고 온통 무료의 양식으로만 자라는 이파리 뒤에 숨어 구..
짝사랑 풀벌레가 운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황금빛 나뭇잎이 노래한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거부하면서 너는 탄생한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라 만차의 기사 돈 키호테! 농부의 딸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듯 나도 그대를 지키는 기사가 되어야 할까보다 기사도를 위해 그대는 공주가 ..
초록 풀꽃처럼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아라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밝고 거기서 출발하리라 대지만 편애하여 어깨를 좁히진 않으리 물오르는 겨울나무가 펼치는 나무초리 끝 이제 막 바람이 간질이고 가는 새싹 그 첫 울음부터 대지를 움켜쥘수록 더 높이 가지를 뻗어 올리는 몸 안에 ..
가물 일렁이는 물결에 여보, 라고 기대 본 적이 있다 당신 물살과 눕고 싶었으나 연줄마냥 팽팽했다 당신의 등에 가 닿으면 썰물은 저만치 달아났다 당신에게 등 돌려 누우면 밀물은 눈동자에 차기 시작했다 빗방울 흐르고 눈물방울 흘러 땀방울에 가뭇없고 쌓여가는 부채는 뱃살로 늘어..
지옥도 그날은 한칼에 베어진 하늘이었고 바다였다 너와 나는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는 고유한 색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쪽에는 나의 하늘이 저쪽에는 너의 바다가 있었다 오직 하늘과 바다 그 갈라진 사이만이 시야에 가득했고 그 사이를 볼 수 없고 ..
공주탑에 기대어 - 뱀을 기다리며 아주 아주 오랜 전 이야기랍니다 그래요 이건 신기한 이야기랍니다 뇌우雷雨가 그친 어느 맑은 봄날 아침 그대는 폭우가 데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무언가에 이끌려 피리를 불었을 뿐이지만 땅이 부르면 하늘이 답하듯 오래 전부터 합을 맞춰온 해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