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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 / 한승태 본문
사치奢侈
낮잠 자고 일요일 오후를 빈둥거렸다
초등생 딸이 요리책 펴고 반죽을 주무르자
서서히 노을은 창으로 들어와 거실에 가득 찼다
책을 뒤적이고 채널을 돌리다 음악을 바꾸고
저녁 곁을 지키며 나는 괜히 서성거렸다
일주일을 한 달을 무엇을 바라 달려왔던가
기억해주지 않는 걸음은 지쳤고 거울은 보기 싫어졌다
몸속에 간들거리는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었다
되직한 반죽에 손가락을 담근 딸은 내게
물을 조금만 더 부으라고 하였던 것도 같고
오븐 속 붉은 공기는 딸아이의 콧노래로 부풀고
남은 것은 어두워오는 떡갈나무 숲으로 건너가
소쩍새 울음으로 둥그러지고 별은 바삭바삭 빛났다
콧노래에서 시작한 불은 내 몸으로 옮겨와
교실 난로 위에 익어가는 도시락이 되거나
장작더미와 저녁 아궁이의 불기운에 아랫배를 덥히고
어슬렁거리다 몸 둘 바 모르던 마음도 바삭하고
계간 <시인수첩> 2018.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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