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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감자꽃 필 무렵/허림

바람분교장 2020. 10. 17. 15:17

감자꽃 필 무렵

 

 

언제든 떠날 애인이었다

집은 자주 비었고

방에선 오래된 냄새가 났다

개들이 짖는 게 낯설지 않았고

괭이들이 뒤돌아보며

뒤란에 몸을 숨겼다

내 모르는 소문이 떠돌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그믐밤도 길은 환했다

애인이 떠난 저녁이었다

 

 

허림 시집_ < 누구도 모르는 저쪽> 중에서

 


이제 감자꽃은 지고 땅속 근육을 키워온 감자들은 지상 위에 올라와서 다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한 남자의 저녁은 아직도 그대로다. 새벽녘 잠깐 뜬다는 그믐달에도 그는 실루엣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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