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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강/문정희

바람분교장 2021. 3. 8. 08:52



             문정희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다 울다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이 사라진 자리
오소소 냉기가 자리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 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인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囚人)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에 얽혀
눈도 귀도 없이 늪에 사는 물귀신들아
끝없이 간섭하던 기도 속의
현모야, 양처야, 정숙아,
잘 가거라. 자신을 통째로 죽인 희생을 채찍으로
우리를 제압하던 당신을 배반할 수 없어
물 밑에서 숨 쉬던 모반과 죄책감까지
브래지어 풀듯이 풀어 버렸다

어머니 장례 날, 여자와 잠을 자고 해변을 걷는 사내*여
말하라. 이것이 햇살인가 허공인가
나는 허공의 자유, 먼지의 고독이다
불쌍한 어머니, 그녀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

 

문정희 시집 <응> 중에서 

 

* 까뮈 <이방인>의 뫼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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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라는 구절이 이 시의 주축을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로 시는 완결되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인간이 된다. 살아가며 딸도 아들도 되고, 남편도 아내도 되고 드디어 어머니도 된다. 그리고 다시 자식을 낳고 인간은 죽어간다. 여기서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자식을 낳고 보살피는 모성, 희생으로의 어머니를 말한다. 현모양처로서 역할 부여를 받고 여자를 내려놓은 어머니말이다. 모성 이전에 여자는 모든 인간처럼 성욕이 왕성하여 건강한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어머니가 운 것일까, 내가 운 것일까? 어머니는 죄 없이 죄 많은 수인같다.  그런데 시의 제목이 왜 '강'일까? 그건 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 처럼 끝나지 않는, 반복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종결되지 않기에 슬픔은 강처럼 넘친다. 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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