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1)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날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공광규 시인은 1960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고, 시집으로 , , 등이 있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을 바쳐 정신없이 산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가족은 가족대로 아버지와 멀어진다. 가족을 위해 산 아버지가 가족과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초라해지는 것이 아버지다. 가족이 그런 아버지의 삶을 알..
새들은 공중에서 정혜영 사막을 건너 멕시코 장벽을 넘으려던 여자의 심장이 멈췄다 맨발은 더 이상 모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선인장이 가시를 견디고 있다 독수리들이 그녀의 마지막을 견디고 있다 뒤늦게 도착한 국경수비대가 흩어진 소지품을 챙긴다 발을 떠난 신발이 국경을 바라보며 저만치 엎어져 있다 인적이 드문 밀입국로, 성공하기 제일 어려운 루트, 사막과 더위와 가난과 희망, 어느 것이 더 무모했을까 국경수비대는 흐트러진 몸을 담요로 덮어주고 옷깃을 여민다 경고문이 적힌 소용없는 팻말들,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진 말들, 그녀의 마 지막 길에 거수경례를 한다 국경을 넘으려는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없는 트렁크 속의 마리 화나, 없는 고가의 물건들,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지은 죄가 없어도 액자 속에서..
오줌 누는 달 절에서 일박은 고요해 숨어 있던 소리를 쉽게 들킨다 늦은 밤 해우소 가는 길에 본 길고도 긴 오줌 누는 소리, 몇 개의 돌확을 지나 내려오는 쪼르륵쪼르륵 흐르던 소리 내려올수록 고요해진다 한밤 참았던 요의는 어디로 흘러갔는지 고요한 돌확에 여러 개의 달이 들어 있다 어는 별에 가면 달은 몇 개의 밤을 흘러 다니고 바람이 불자 벚꽃 잎 우주선 착륙하듯 돌확에 내려앉는다 달밤의 절집 마당가 누군가 달의 뒤로 돌아가서 오줌을 눈다면 엉덩이 뒤만 보이듯 달의 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일 아래쪽 웅덩이에서 떠간 찻물이 졸졸 끓고 졸아들고 있다 힐끗, 돌아앉아 달이 오줌을 눈다 사람이 숨은 사람 숨어 있는 사람이 있다 잠깐 숨었다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길게 나보다 더 나 같이 숨어 있는 사..
낮은 목소리 성가대에 들어간 것은 중학교 때였다 일요일 오후엔 찬양 연습을 했다 끌어내리듯 부르는 것이 나의 문제라고 노래 부르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의자와 거기 울리는 소리가 좋았다 말씀을 처음 배운 것은 말을 익히기 전의 일이었다 그것을 배우며 하나님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목소리가 커졌다 잦아들었다 공간이 울고 있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소리가 있어 계속 눈앞에서 타오르는 푸른 나무만 바라보았다 끌어내리듯 부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어려서 신을 믿지 못했다 낮은 곳에 임하소서, 라는 구절은 말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많이 들은 말이다. 동양에서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온갖 생명을 먹여살린다는 말과 진리는 물과 같다는 ..
윤동주 무덤 앞에서 정호승 이제는 조국이 울어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눈물을 흘렸으므로 이제는 한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마른 잎새들이 울어야 할 때다 이제는 조국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목숨을 버렸으므로 이제는 한 젊은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죽어서 사는 길을 홀로 걸어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사나이 무덤조차 한 점 부끄럼 없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나이 오늘도 북간도 찬 바람곁에 서걱이다가 잠시 마른 풀잎으로 누웠다 일어나느니 저 푸른 겨울하늘 아래 한 송이 무덤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을 위하여 한 줄기 해란강은 말없이 흐른다 시인의 길이 이토록 무섭고 아득하다. 조국이 한 명 한 명 개인을 ..
병원이 있는 거리 건축자재가 녹스는 공터를 지나 만화책을 든 소녀가 햇살에서 걸어 나온다 소녀의 이마에서 떨어지는 웃음소리가 간간이 튀어 오르고 나는 벽공 가득 내 발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공터를 지나면 아주 오래된 평화교회가 나오고 누구에게나 햇살과 복음을 던져주는 참새들 둥지를 튼 담쟁이넝쿨 속 병원은 환하다 의사는 느닷없이 문을 닫고 참새들은 분주히 퇴근한다 병원을 지나 강가에 이르면 먼 구름이 애써 중력을 버티고 있다 소녀는 힘껏 강물의 힘살을 열어젖히고 거미줄과 강아지풀과 탱탱하게 물먹은 바람이 죽은 사마귀와 송장메뚜기 그리고 개미들의 행진이 버려진 흑백 TV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가을에 진찰받으러 간다 시집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의 첫 문장은 "나는 병든 인간이다”. 이 첫 문장은 번역자마다 ..
이깔나무가 물들면 가을 끝자락이다. 가장 늦게 물드는 나무기 때문이다. 겨울까지 이깔나무는 물들다 비 내리듯 잎을 떨군다. 그 아래 서면 떨어지는 소리가 가랑비 내리는 거 같다. 이깔나무는 잎갈나무 또 낙엽송으로도 불린다. 현재 남쪽 산에 식재된 이깔나무는 일본 낙엽송이다. 우리 고유의 이깔나무는 백두산 아래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고 백두산에서 캠핑을 한 호주의 캠퍼가 전한다. 우리 산에 식재된 낙엽송 군락이 있는 자리는 1968년 이전 화전민이 살았던 곳이다. 공비가 있던 시절 그들을 버덩으로 끌어내려 독가촌을 만들었다. 그들의 빈 자리에 식재가 된 게 낙엽송이다. 그러니까 남쪽 산에 군락을 이루는 낙엽송이 자라는 곳은 화전민의 흔적일 수 있다. 평창, 인제와 홍천의 내면 쪽에 낙엽송이 많은 건 3차..
개싸움 이상국 나는 감춘 것도 별로 없고 그냥 사는 게 일인 사람인데 동네 철대문집 개는 내 발소리만 들어도 짖는다. 산책 갈 때도 그 집 대문에서 되도록 멀리 근신하며 지난가지만 매번 이제 됐다 싶은 지점에서 그가 담벼락을 무너뜨릴 듯 짖어대기 시작하면 뭔가 또 들킨 것처럼 가슴이 덜컹한다. 나는 쓰레기도 철저히 가려서 내다 버리고 적십자회비도 제때 내며 법대로 사는 사람이지만 아무래도 그는 내 속의 누군가를 아는 것 같다. 그깟 개를 상대로 분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겁을 먹은 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이 개든 무엇이든 내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언짢은 일이다. ---------------------------- 내 안을 꼭 들킨 거 같은 기분은 아무래도 좀 조심스럽다. 우리가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
달맞이꽃 한 아이가 돌을 던져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이홍섭 시집, 《숨결》 사춘기 아이가 좋아하던 이는 누구였을까? 제목이 달맞이꽃인걸로 보아 한밤 중에 무엇인가를 본듯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말을 건넸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두려워 편지를 전하고 돌아서 냅다 뛰던 것도 같은 마음 같기도 하다. 이제 다시 달밤에 피어나는 꽃을 본다. 나는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을까? (한승태)
再 活 8 - 저수지 고여 있음으로 빛나는 물은 저수지뿐이다. 젖통이 열 개인 돼지가 새끼 열두 마리를 낳았다. 계산상으로는 두 마리가 굶어죽어야 하는데, 열두 마리 모두 살아간다. 에미가 양보를 모르는 새끼들을 떠밀어 골고루 먹이는 것이리라. 빛나는 물도 썩을 줄 안다. 고여 있음으로 썩을 수 있는, 썩어가는 바닥에서 부글거리는 애벌레, 언젠가 진흙바닥으로부터 솟아올라 날개를 푸드득이며 날아오르려는 애벌레의 생. 박기동 시집, 〈나는 아직도〉 중에서 부활은 저수지의 생태와 새끼 낳은 돼지를 병치로 보여준다. 저수지는 물을 가둬 담아놓은 곳이다. 저수지의 물은 농사에 쓰일 물이다. 고이면 썩는다는 경구를 비틀어 오히려 썩어서 빛나는 생을 얘기한다. 그 썩은 곳에서 알을 까고 나오는 애벌레, 날아오르는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