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180)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낮과 밤의 발걸음 최승호 내가 나무 말 열두 마리를 끌고 가는 것이 삶이라면 나무 말 열두 마리가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죽음이다 최승호 시집 중에서 은 최승호의 시에서 꽤 난해하다고 알려졌다. 난해보다 대략의 의미는 유추되어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우선 시에는 드러나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 낮과 밤, 그리고 발걸음, 나무 말, 열두 마리, 삶과 죽음 정도다. 낮과 밤이니 시간과 연관이 있을 거 같고, 발걸음이 시간이나 세월 정도거나 그걸 사람으로 연장하면 인생 정도로 해석될 거 같다. 그러니 제목을 인생으로 상정하고 풀어보자, 그럼 본문에서 나는 나무 말 열두 마리를 끌고 가거나 끌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끌고 가는 능동적인 것이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삶이라는 얘기다...
앵두꽃을 찾아서 앵두꽃을 보러 나, 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갔으나 산은 또한 나뭇잎들의 시퍼런 고독을 보여주고는 이파리에 듣는 빗방울들의 서늘한 비가를 들려주었네 남악에서 들려오는 비가를 들으며 나, 또 다시 앵두꽃이 피는 항산을 찾아 떠났으나 내 발걸음 비장했음은, 내 마음 속으로 이미 떨어져 휘날리는 꽃잎의 숫자 많았음에랴 그리고 나, 문지방에 앉아 문득문득 앵두꽃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보지 않은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아름다운 구석을 떠올리겠지만 앵두..
엄마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행상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산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거랑 입을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김종삼_ 「엄마」 전문 우리가 기도하고 원망하는 신은 어디 있나? 우리가 갈구하는 신은 가장 낮은 계단이면서 가장 높이 오르는 계단일 터이다. 죽지 않는 계단이라기 보다 죽을 수 없는 계단일지 모르겠다. 나를 먹여 살리고 키운 건 8할이 엄마다. 내가 파먹은 무덤도 엄마다. 툭툭 던져진 조각 이미지만으로 거대 서사를 만드는 그가 좋다.
강원도 출신이거나 강원도에 살고 있는 시인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원도 시인의 정서를 들여다보면 나의 정서도 보입니다. 이 번 연재를 이렇게 시작해 봅니다. 한 번에 보낼 때, 4편씩 보내드릴게요. 떨어지기 전에 독촉을 해주세요. 한승태 / 내린천에서 태어나 시집 외 2권이 있고 애니메이션 평론집가 있다. 춘천에서 조용히 시 쓰는 사람이다. 일신상의 비밀 또 겨드랑이가 가렵다 침울한 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긁어보지만 참을 수 없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숙연한 영업실적 보고회의 감원을 해야 한다고 사장은 딱딱거리는데 문제는 내 겨드랑이다 삐죽 날개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옷을 벗을 때마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아내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개는 점점 자란다 조심해야 한다 내눈은 점..
參禮店房小似蝸 삼례 객방은 달팽이집 같아 작은데 更深獨座(別)燈花 밤 깊도록 홀로 앉아 등잔불 돋우네. 脩程暗暗長排日 긴긴 날 날마다 쉬지 않고 걸어 / 아스라이 먼 길에 해도 날마다 걸어 魂夢營營幾到家 꿈속에 아등바등 몇 번이나 집에 갔던가. 千里回還空喫苦 천리길 돌아오니 숱한 고생은 부질없고 三冬課業譞(誇)抛他 한 겨울 학업은 공연히 버려두었네. 人生一步皆關命 인생은 걸음마다 모두 운명이거늘 何必長吁復短嗟 길고 짧게 탄식한들 무엇하겠나. 호행록(湖行錄) / 전광훈(田光勳) 중에서 1774년 / 20x17cm / 39장 1책 / 전광훈 친필본 이 책은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전광훈(1722~1776)이 1774년경에 쓴 친필 시문집으로 미간행본이다. 그는 담양(潭陽)인으로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175..
제비꽃 다시 돌아왔다, 무덤가 제비꽃 겨우내 그 미련함만 뽑아내기로 한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 참 송구하다 결국은 내가 속고 마는 경지가 아니고서야 당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봄 뽑아낸 자리마다 미련은 피고 또 핀다 한승태 시집 중에서
등이 열린 사람 어느 밤이었다 경사가 쌓인 인도를 올라가는 사람의 등을 보고 있었다 어느 밤이었다 등이 열린 사람을 보고 말았다 이 세상의 구멍이 거기에 있었고 나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 등으로 어둠이 들어가고 있었다 셀 수 없었지만 어둠이 그 등을 가득 채우자 등에서 더 짙은 어둠이 쏟아지고 있었다 등이 열린 사람을 보았다 등이 열린 사람이 비탈진 길을 오르고 있었다 안주철 시집 중에서 ------------------------------------------- 등이 열린 사람은 어둠 속의 사람이고 어둠을 불러들이고 어둠을 쏟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주변에는 불빛조차 허락되지 않기에 그는 실루엣으로만 존재한다. 그는 구분되지 않는다.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실루엣은 거기서 나와 어둠과 교감..
강 문정희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다 울다 태양 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이 사라진 자리 오소소 냉기가 자리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 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인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囚人)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에 얽혀 눈도 귀도 없이 늪에 사는 물귀신들아 끝없이 간섭하던 기도 속의 현모야, 양처야, 정숙아, 잘 가거라. 자신을 통째로 죽인 희생을 채찍으로 우리를 제압하던 당신을 배반할 수 없어 물 밑에서 숨 쉬던 모반과 죄책감까지 브래지어 풀듯이 풀어 버렸다 어머니 장례 날, 여자와 잠을 자고 해변을 걷는 사내*여 말하라. 이것이 햇살인가 허공인가 나는 허공의 자유, 먼지의 고독이다 불쌍한 어머니, 그녀가 죽자..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 불편당 일기 벌건 숯이 담긴 화로의 잿불 속에 시린 발목을 파묻고 싶은 혹한의 밤, 요강을 씻은 손으로 쇠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었지 괜찮아 쩍쩍, 달라붙어도 괜찮아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잖아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저 터무니 없는 약속, (예컨대, 정치인들의 약속!)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잖아 식구들이 타고 앉은 요강 속 오줌에도 살얼음이 끼는 밤, 골고루 가난해지기를 빌고 또 빈다 고진하 시집 중에서 목사이며 시인인 고진하 시인께서 정말로 우리가 골고루 가난해지길 바란 걸까? 불량한 마술은 따로 있다며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터무니없는 약속을 꺼내 들었을 때 우린 알게 된다. 가난한 마술이야 혹한이 찾아오면 발생하지만 혹한이 아니어도 선거 때만 되면 잘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