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전광훈 / 호행록 중에서 삼례 부분 본문
參禮店房小似蝸 삼례 객방은 달팽이집 같아 작은데
更深獨座(別)燈花 밤 깊도록 홀로 앉아 등잔불 돋우네.
脩程暗暗長排日 긴긴 날 날마다 쉬지 않고 걸어 / 아스라이 먼 길에 해도 날마다 걸어
魂夢營營幾到家 꿈속에 아등바등 몇 번이나 집에 갔던가.
千里回還空喫苦 천리길 돌아오니 숱한 고생은 부질없고
三冬課業譞(誇)抛他 한 겨울 학업은 공연히 버려두었네.
人生一步皆關命 인생은 걸음마다 모두 운명이거늘
何必長吁復短嗟 길고 짧게 탄식한들 무엇하겠나.
호행록(湖行錄) / 전광훈(田光勳) 중에서
1774년 / 20x17cm / 39장 1책 / 전광훈 친필본
이 책은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전광훈(1722~1776)이 1774년경에 쓴 친필 시문집으로 미간행본이다.
그는 담양(潭陽)인으로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1753년 무과에 합격하여, 1754년 선전관(宣傳官), 내금장(內禁將), 1755년 이천부사(伊川府使), 1756년 백령첨사(白翎僉使), 1758년 선천부사(宣川府使), 1759년 전라감영중군 부호군(全羅監營中軍 副護軍), 1762년 창원부사(昌原府使), 1766년 전라우수사, 1768년 풍천부사(豐川府使), 1769년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충청수사(忠淸水使), 수어중군(守禦中軍)부총관(副摠管), 1744년 황해병사(黃海兵使) 등을 지냈다.
아버지 전운상(田雲祥, 1694∼1760) 역시 무신으로 1740년 전라좌수사를 지냈으며 수군의 특수함정인 해골선(海鶻船)을 건조했다. ≪영조실록≫에 이 배는 “몸체가 작고, 가볍고 빨라서 바람을 두려워할 염려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골선은 이순신의 거북선 이후 조선 후기에 등장한 주목할 만한 군선이었다.
숙부 전일상(田日祥, 1700~1753, 전라우수사)와 전천상(田天祥, 1705 ~ 1751, 나주영장)은 물론 영장(營將)을 지낸 형 전광집(田光集)과 칠원현감(漆原縣監),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전광국(田光勳) 등 그의 집안은 조선 최고의 장군 가문이다.
이 필사본은 세로 20cm, 가로 17cm의 선장본이다. 본문은 모두 39장으로 고급 장지에 시종일관 수려한 필체로 썼다. 원래는 본문만 철하여 보관되었던 것을 1900년 전후 경에 표지를 씌웠다. 원래 표제가 없었기에 표지를 씌우면서도 제목을 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호산방이 편의상 제목을 호행록(湖行錄)이라 했다.
체제는 첫 부분 4수의 시를 제외하곤 시(詩)·문(文) 구분 없이 기행순서(연대기)로 기록했다. 본문은 ‘만관(灣館)’으로 시작된다. 만관은 바닷가 객사를 뜻하는 말로 전라우수사인 저자가 거처하던 곳에서 지은 진중시(陣中詩)다.
계속하여 ‘해운대(海雲臺)’(*부산 아님) 시 3수가 보인다. 호행록(湖行錄)은 26세때인 무진(1748)년에 쓴 시로 전라도 여행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문의 제목은 안성도중(安城途中) 공주(公主) 효발공산(曉發公山) 은진도중(恩津途中) 우(又)피마탄(疲馬歎) 기행이체(記行俚軆) 여산효발(礪山曉發) 노태편(駑駘篇) 주명(酒名) 목비(木碑) 효행삼장삼오칠언(曉行三章三五七言) 요체영호남풍토(拗體咏湖南風土) 태인피향정(泰仁披香亭) 숙두타막(宿頭陀幕) 효발두타막(曉發頭陀幕) 과정읍억이충무(過井邑憶李忠武) 동로탄(冬路歎) 장성로기분(長城蘆妓墳) 우(又) 오말함평(午秣咸平) 우수영(右水營) 등산포(登山浦) 동성관충무비회차김부제학진상판상운(東城觀忠武碑回次金副提學鎭商板上韻) 우(又) 증종인전광두(贈宗人田光斗) 명량조이충무(鳴梁吊李忠武) 낭주대월루(朗州對月樓) 영산강(靈山江) 나주망화루(羅州望華樓) 여산효로(礪山曉路) 삼례여점(參禮旅店) 등으로 모두 32편이다.
당시 저자는 무과에 급제하기 5년 전이었지만 부친 전운상(전라좌수사)과 숙부 전일상(전라우수사) 전천상(나주영장)의 연고로 전라도 지방을 여행한 듯하다. 이때 저자는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면서 장수의 꿈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동엄록(東淹錄)은 경오(1750)년 숙부 전천상이 춘천부사로 있을 때 춘천기행이다. 주소소양하류(舟泝昭陽下流) 기행(紀行) 등 16편이 실려 있다. 동협록(東峽錄)은 을해(1755)년 이천부사(伊川府使) 시절로 장부관도상감음(將赴官道上感吟) 등 19편을 실었다.
서명록(西溟錄)은 병자(1756)년 백령첨사(白翎僉使) 시절로 희제백령헌벽배체(戱題白翎軒壁俳體) 등 9편 외에 17편의 해수잡영(海戍雜詠)과 수루한황(戍樓閑況) 외 3편 등은 모두 서해 백령도 진중(陣中)시다. 저자는 충무공의 시구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 일련을 평생 가슴 속에 담고 산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축(1757)년에는 백령도 부근의 마합도(麻蛤島)에서의 시문이 있다. 백령첨사를 마치면서 지은 파수잡영(罷戍雜詠)은 모두 5편에 이르며, 부조군(赴操軍) 때 지은 시와 기묘(1759)년과 계미(1763)년 창원부사 시절의 시 환숙노량충무사차수의운(還宿露梁忠武祠次繡衣韻) 등이 있다.
특히 제승당차판상퇴어상공운(制勝堂次板上退漁相公韻)은 저자가 병술(1766)년 전라우수사 시절에 지은 시다.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장군이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곳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협의하였던 집무실이다. 원래는 운주당(運籌堂) 터다. 운주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이르는 곳인데, 1740년에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 했다. 퇴어는 좌참찬 金鎭商(1684~1755)의 호다.
기축(1769)년과 갑오(1774)년의 시도 보인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또 다른 호행록(湖行錄)을 싣고 있는데 저자는 죽음을 2년 앞두고 전라도 지역을 다시 여행한다. 3월에 시작한 글은 같은 해 4월 초팔일 15편으로 끝맺었다.
이처럼 이 책은 단순히 풍류만을 읊은 기행시문집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구국충절 정신을 평생 자신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던 전광훈 장군의 신념과 충절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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