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승태 (68)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와우(蝸牛) 일 만년의 시간을 끌고 나와 충분히 미련할 줄 알고 대지의 연한 입술만 더듬는 그를 때를 기다려 밭가는 맨발의 황소 라고 부르자, 농경민족의 기억 속에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햇살가시나무처럼 바람의 워낭소리 낭자하고 온통 무료의 양식으로만 자라는 이파리 뒤에 숨어 구..
짝사랑 풀벌레가 운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황금빛 나뭇잎이 노래한다고 내가 넘어가나봐라 거부하면서 너는 탄생한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라 만차의 기사 돈 키호테! 농부의 딸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듯 나도 그대를 지키는 기사가 되어야 할까보다 기사도를 위해 그대는 공주가 ..
초록 풀꽃처럼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아라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밝고 거기서 출발하리라 대지만 편애하여 어깨를 좁히진 않으리 물오르는 겨울나무가 펼치는 나무초리 끝 이제 막 바람이 간질이고 가는 새싹 그 첫 울음부터 대지를 움켜쥘수록 더 높이 가지를 뻗어 올리는 몸 안에 ..
가물 일렁이는 물결에 여보, 라고 기대 본 적이 있다 당신 물살과 눕고 싶었으나 연줄마냥 팽팽했다 당신의 등에 가 닿으면 썰물은 저만치 달아났다 당신에게 등 돌려 누우면 밀물은 눈동자에 차기 시작했다 빗방울 흐르고 눈물방울 흘러 땀방울에 가뭇없고 쌓여가는 부채는 뱃살로 늘어..
지옥도 그날은 한칼에 베어진 하늘이었고 바다였다 너와 나는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는 고유한 색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쪽에는 나의 하늘이 저쪽에는 너의 바다가 있었다 오직 하늘과 바다 그 갈라진 사이만이 시야에 가득했고 그 사이를 볼 수 없고 ..
공주탑에 기대어 - 뱀을 기다리며 아주 아주 오랜 전 이야기랍니다 그래요 이건 신기한 이야기랍니다 뇌우雷雨가 그친 어느 맑은 봄날 아침 그대는 폭우가 데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무언가에 이끌려 피리를 불었을 뿐이지만 땅이 부르면 하늘이 답하듯 오래 전부터 합을 맞춰온 해금의 ..
천사의 나팔 청개구리 나발 불고 소낙비 그친 저녁은 여름 치정과 복수에 이어 흙냄새를 전염시키는 세간이여 그대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이다 사도使徒가 이끌고 당도하는 천국의 때깔과 향기 마감 기사와 저녁식사를 함께 해결하는 오늘 내 오랜 절망도 결국 사랑으로 끝나리란* 속삭..
낙화 어둠 너머 개가 짖고 이제 너는 세상 모든 두려운 이 얼굴을 안고 떨어진다 허기를 안고 떨어진다 밖으로 난 창문을 닦는 건 나인데 아무래도 나를 바꾼 건 너 같고 눈 감으면 꽹과리소리 들린다 너의 혀는 대지 깊숙이 젖어있고 너는 생을 불 밝히고 왔으나 이제 짙푸른 지옥을 맛보..
무엇을 태울 것인가? 이창동의 (버닝> 한승태(시인/학예연구사) 정말 오랜 만에 극장에 가 영화를 보았다. 그것도 아내와 큰 딸을 대동하고 청불영화를 같이 보았다. 믿을 만한 지인의 소개였기에 큰 맘으로 갔던 것이다. 언론에서 혹은 페북에서 얘기하는 대로 영화는 잘 만들어졌다. 그..
시인이여, 너의 얼굴에 침을 뱉어라! 한승태 최근 여성 시인, 작가들의 고백 및 작품 발표로 문학계가 낯부끄러운 이전투구의 장 같다. 그러나 진즉에 터졌어야 할 일들이다. 우리가 사는 당대는 바뀌고 있다. 변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도 만만치 않다. 첨단을 달린다는 글 쓰는 집단에도 예외가 아니다. 나부터도 그렇다. 고백하자면 나의 글도 여자에게 마음을 얻기 위한 제스처였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세계관이 있었겠는가. 그런 거 없었다. 대학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에게도 참 많은 누를 끼치고도 독설을 퍼붓고, 어찌어찌해보려고 했다. 인정한다. 마치 그것이 문학하는 자의 특권인양,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그런 선배들을 부러워했으면서도 욕했다. 그러면서 선배가 되어서는 나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