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창작/시 발표작 (37)
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공주탑에 기대어 - 뱀을 기다리며 아주 아주 오랜 전 이야기랍니다 그래요 이건 신기한 이야기랍니다 뇌우雷雨가 그친 어느 맑은 봄날 아침 그대는 폭우가 데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무언가에 이끌려 피리를 불었을 뿐이지만 땅이 부르면 하늘이 답하듯 오래 전부터 합을 맞춰온 해금의 ..
천사의 나팔 청개구리 나발 불고 소낙비 그친 저녁은 여름 치정과 복수에 이어 흙냄새를 전염시키는 세간이여 그대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이다 사도使徒가 이끌고 당도하는 천국의 때깔과 향기 마감 기사와 저녁식사를 함께 해결하는 오늘 내 오랜 절망도 결국 사랑으로 끝나리란* 속삭..
낙화 어둠 너머 개가 짖고 이제 너는 세상 모든 두려운 이 얼굴을 안고 떨어진다 허기를 안고 떨어진다 밖으로 난 창문을 닦는 건 나인데 아무래도 나를 바꾼 건 너 같고 눈 감으면 꽹과리소리 들린다 너의 혀는 대지 깊숙이 젖어있고 너는 생을 불 밝히고 왔으나 이제 짙푸른 지옥을 맛보..
달맞이 꽃 - 예이츠에게 북두성도 너무 더워 밤늦은 개울가에 몸 씻으러 내려올 때 나 들꽃 만발한 개울가로 내려갔지 더위보다 비탈진 내 청춘의 울혈 멈추지 않아 상여막 아래서 웃통을 벗어젖히고 짐짓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댔지 멀리서만 반짝이던 반딧불이 놀라 부산히 날아오르고 ..
금낭화 유월 한낮 어린 딸을 데리고 옛 마을의 山寺로 산책 간다 경내 스피커에선 목탁소리 대신 녹음한 부처 말씀만 또랑또랑 흘러나오고 사천왕 대신 개 두 마리 배 내놓고 낮잠 잔다 햇살은 화엄경 마냥 저리 넓어서 설법 위로 떠도는 자벌레가 무량한 햇살의 반죽을 펴놓고 주무른다 ..
봄비 한승태 흰 사기요강에 부서지는 별빛과 가랑이 벌린 山할미 엉덩이 아래는 천개의 봉우리와 천개의 골짜기 아이를 비워낸 자리엔 소쩍새 울음 닮은 삼백예순날 산 주름만 남아 주름이 주름을 불러 한숨을 만들고 한숨 차곡차곡 접혀서 가없는 넓이로 눈앞에 막막하게 펼쳐져 올 때 ..
아주 오랜 산책 한 승 태 몇 차례의 건널목을 건너고 또 몇 번의 교차로에서 망설였던가 강 저쪽은 동굴처럼 검은 아스팔트 바퀴들만 바쁘고 모든 인연의 다리가 끊긴 사내는 이쪽 강변의 무성한 풀포기와 앉는다 가끔은 강 건너오는 경적에 얇은 귀가 쓰러지고 허한 시선을 바람의 혀가 핥기도 한다 ..
죽은 가수의 노래 - K에게 지친 어깨를 가누는 그대 청평사엘 다녀왔다 배후령을 넘으며 죽은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그대 지나온 계곡에는 놀다온 자리가 있고 목청껏 불렀던 청춘은 계곡의 곡조를 따라가고 바람이며 햇살로 밝아지는 돌탑과 모래무덤들 한가락 올라가다 늘어지는 진혼제나 49제처럼 ..
오래된 우물 기린도 운다는 계곡 밤바람은 깊어서 무너져 내린 간장 항아리 두어 개 밤나무 아래 우물이 하나 수척한 눈이 하늘을 껌벅이고 별은 떨어지며 요령소리를 낸다 제사장의 촛불에만 몸을 허락했을 고분벽화처럼 손길 지워진 곳에서 바스러지는 순이, 너의 뒷모습을 본다 갑자기 들이닥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