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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나를 위한 기다림/박세현

바람분교장 2025. 2. 4. 16:16

나를 위한 기다림

 

 

지금 영화관에 앉아 있다

나는 내 인생의 관람객

3등석 C열에 앉아서 꿈과 인생이 

모호하게 뒤섞이는 영화를 보노라면

저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도

나의 근원을 알 수 없다

약간 우울했지만 꾹 참으면서 

영화관 앞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오래 기다린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희망을 내려놓고 기다린다

언제 또 이렇게 이유없이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 누군가를

기다려볼 날이 있겠어

버스가 도착하고 낯선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 떠나가는 사람들

나를 위한 이 막연한 기다림!

나는 누구의 대역이던가

 

 

박세현 시집 <날씨와 건강> 중에서 


1953년생,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상주작가로 있는 박세현 시인의 시를 읽고 있다.  예술영화관 아트스페이스의 중독자이며 거리탐색자이며 빗소리듣기모임의 준회원이고 파도 감별사인 시인의 시를 읽으면 시는 이래 쓸쓸하구나, 희극적인 맛이 있구나,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도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을 스크린으로 들여다보는 시인은 오히려 스크린 속의 내가 더 나답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파트의 상주작가 현실은 밋밋할까? 고도가 아니더라도 기다림은 삶의 동력이 될 것이다. 될까? 이 막연함, 스크린 속의 주인공에게 있을 서사와 운명은 부조리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아파트 상주작가의  현실은 부조리할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나온 지혜는 온갖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그건 서사의 양념일 뿐, 우린 그냥 사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열심이 의미를 만들지도. 

이번 시집의 제목은 <날씨와 건강>이다. 의미심장하다. 세월이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희망을 얘기하야 할 거 같기도 하다. 전업시인의 시를 보면 시는 위치잡기 같다. 경계선 상에서 줄티기가 그의 특기다. 바닷가 모래톱에 드나드는 파도에 발을 뺏기지 않으면서 해변을 걷기, 나라는 모래성을 지었다 허물었다, 현실과 상상, 영화와 현실, 시인과 비시인, 그 경계선으로 시적 긴장을 유지한다. 유일하게 그가 몸을 담그는 건 빗소리와 음악같다.  소리만이 그를 지배한다. 그는 그렇다치고 나는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 (한승태) 


한선생님

제 시를 관통하신 비평적 독후감이
아주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두말없이 고마워서 공유했습니다.
언젠가 이 포스팅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미리 허락을 구해두렵니다. 多謝.
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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