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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춘천사람들

바람분교장 2021. 5. 4. 13:54

강원도 출신이거나 강원도에 살고 있는 시인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원도 시인의 정서를 들여다보면 나의 정서도 보입니다. 이 번 연재를 이렇게 시작해 봅니다. 한 번에 보낼 때, 4편씩 보내드릴게요. 떨어지기 전에 독촉을 해주세요.

 

한승태 / 내린천에서 태어나 시집 <사소한 구원> 외 2권이 있고 애니메이션 평론집<#아니마>가 있다. 춘천에서 조용히 시 쓰는 사람이다.

 


 

일신상의 비밀

 

 

 

또 겨드랑이가 가렵다

침울한 과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긁어보지만

참을 수 없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숙연한 영업실적 보고회의

감원을 해야 한다고

사장은 딱딱거리는데

문제는 내 겨드랑이다

삐죽 날개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옷을 벗을 때마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아내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개는 점점 자란다

조심해야 한다

내눈은 점점 위로

사무실 천장을 뚫고 옥상 위로

저 아래에서 날 부르는 날카로운 소리

하지만 난

맷돌에 눌려 죽은 아기처럼

자꾸 겨드랑이가 가렵다

 

전윤호 산문집_<나에겐 아내가 있다> 중에서

 

압권이다. 이 시대 직장인의 소망이나 삶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다. 한 번만 읽으며 뭔 얘기인지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는 시다. 쉽다고 그 내용이 별 거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자의 고통과 삶을 이토록 선명하고 쉽게 상징화하다니. 날개는 아마도 사표나 하고 싶은 일일 터인데, 사표를 던진다고 자유롭지 않거니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도 쉽지만 않다는 게 체제의 견고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방식의 삶을 꿈꾼다. 질투가 나는 시다. 이 시대의 아기장수들이여 그래도 날개를 펴 보자. 한승태(시인)

 

 

 

 

 

중학교 선생

 

 

 

백창우의 동요 ‘내 자지’를

너무 무겁게 가르쳤다고

학부모들에게 고발당했다

 

늙어서까지 젖을 빠는 건 사내들이 유일하다고

떠도는 진실을 우습게 희롱했다가

여교사들에게 고발당했다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 피고 오줌 쌌다고 주민 신고 받고

홧김에 장구채 휘둘렀다가

애한테 고발당했다

 

자지는 성기로 고쳐 부르겠다

젖 같은 얘긴 하지 않겠지만 만약 하게 될 일이 있다면

사람이나 포유동물에게서 분비되는,

새끼의 먹이가 되는 뿌연 빛깔의 액체로 고쳐 말하겠다

그리고 애들 문제는 경찰에 직접 맡기겠다

 

잘 있어라 나는 간다

수목한계선이 있는 학교여

 

권혁소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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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금기 설정하는 학교를 보여준다. 아니 선생을 반성한다. 가르침을 반성한다. 학교는 나무를 더 이상 자라지 않게 하는 한계 짓는 거와 같다. 원래 선생은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사회가 요구하는 금기를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다. 선생이 아닌 학부모가, 동료 교사가, 제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 여기서 간섭은 금기와 같은 말로 보인다. 상상력 풍부한 중학생들에게 상상력을 들쑤시면 안 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금기만 주입하면 될까? 교육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난장이가 된 인간을 니체는 슬퍼하였다. 나도 하늘이 멀어 슬픈 날이다. (한승태)

 

 

 

 

 

심퉁이

 

 

우리 동네 바다에는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만사가 심퉁이라 무리를 짓지 못하고

저 홀로 심퉁한 입술을 바위에 대고 산다

 

내 마음의 바닷가에도 심퉁이라는 고기가 산다

심퉁하게도 생긴 이놈은

세상과의 불화가 끝이 없어

심퉁한 입술을 돌덩이에다 붙이고 하루해를 보낸다

 

하루에도 열두 번

심퉁한 입술로 돌덩이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이홍섭 시집 <검은 돌을 삼키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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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집에는 선승의 결기가 드러난다. 시에는 마지막에 이르러 한칼이 그어져있다. 그를 칼잡이라 하면 혼날 거 같고, 선사라 하면 도리질 칠 터인데, 그의 말대로 좋은 음악과 좋은 향기를 쫓는 건달바라 부르기로 하자. 그것도 어느 폐사지를 거니는 건달바와 같다. 허허로운 연애와 황량한 석양 아래, 사연을 짐작하며 밝아보는 초석, 무너진 기와장과 돌탑 옆에 무심코 핀 애기똥풀, 무심한 듯 그는 진하다. 잿더미가 내려앉은 자리, 돌아가야 할 곳을 잃은 그의 긴긴 그림자를 가늠한다. 수호해야할 불법이 무너진 세상에서의 건달바는 그 수단을 달리한다. 그게 시일 것이다.

그의 시는 가뭇없는 바다의 이내 같다. 폐사지를 떠도는 범종 같은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조곤조곤 조인다. 그는 선문과 속문 사이에 가랑잎 타고 미끄러지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건달도 울화는 있을 터. 마지막 결구는 시조의 종장이나 한시의 결구, 하이쿠나 선사들의 공안을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사고 시인이고 칼잡이다. 한칼을 날리기 위해서는 조곤조곤해야 한다. 연과 연 사이에서 놀거나 행과 행 사이에서 놀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는 옛날 사람처럼 여유를 조곤조곤 나눠주는 사람이다. 시를 읽다 심장을 베이고 말았다. 결국 칼은 내게 향하기 때문이다. (한승태)

 

 

 

 

 

호숫가 학교

 

 

 

푸른 샛별로 세수를 하고 나오는 너희들이 모여

여기, 호수를 이룬다

 

너희는 자전거로 태양을 굴리고 오거나

걸어서

개울가 산사나무로 푸르게 얘기하며 오고 있구나

 

언제나 봄은 너희에게서 꿈꾸는 것

때로 휘날리는 꽃잎이며 노을이

어찌 너희를 앞질러갈 수 있겠는가

 

새들은 늘 너희들 날개 속에서 날아갔고

나무들 또한 너희에게서 숲을 이루거늘

저 강물을 따라가 보아라

강기슭도 단단한 하루의 노래가 되고

밤을 적시던 등불들도 얼마나 따뜻한 옷감이 되는가

 

때로 야콘을 파 헤집고

고구마의 굵은 야심작을 찌고

옥수수의 음률을 뜯으며

우리들의 시간도 익어갔거늘

 

다시 별들로 돌아오는 우리들의 호수를 잊지 말라

너희들 가슴에 긴긴 편지로 남아

너희들을 잊지 못해

여기서 동화처럼 늙어갈 이 호숫가 학교를

 

 

조성림 시집 <천안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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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호숫가 학교에 스승의 날이 찾아왔다. 시인은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학생들에게 뜻있는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오래 전부터 내게 졸랐다. 나는 어렵지 않게 약속하였건만 그는 잊을만하면 전화를 주곤 했다. 내 기억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름 애정의 표현이었다. 그가 학생들과 나누는 애정을 시 하나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때로 야콘을 파 헤집고 / 고구마의 굵은 야심작을 찌고 / 옥수수의 음률을 뜯으며' 그들의 시간도 익어갔다는 걸 충분히 알겠다. 이런 구체성이 없었다면 적당히 감상을 자극하는 시로 존재했으리라. 그의 시는 구체성을 얻었고, 그의 학생에게는 두고두고 꺼내 즐길 수 있는 보물이 되었다. (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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