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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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현기증/이유선

바람분교장 2019. 10. 30. 14:06

현기증

 

 

너는 내 접시에 조개를 건네주었다

 

미처 해감하지 못한 흙이 씹혔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왜 하필 너는 이런 걸

 

언젠가 너와 나는 낯선 곳을 찾아 무작정 걸었다

어딘가에 닿으면 우리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는 바다로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실패한 우리의 산책을 닮은 빈 껍데기

그 속에 담겨 있었을 캄캄한 가능성들

 

처음으로 돌아가려면 상상력이 필요했다

 

눈 앞의 모든 것들이 가만히 있다고 착각하고 싶었을지도

성공을 예감하는 일이란 바로 그런 것

 

미안한 듯 웃어 보이는 너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는 물을 마시며 이 사이에 낀 흙알갱이를 삼켰다

 

가자, 이제

너는 늘 그랬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이 일어 주춤거리는 사이

너는 이미 사라지고

 

나는 손잡이만 손에 쥔 사람처럼

나가는 문을 찾았다

 

모르는 곳이었다



2019년 <시인동네>신인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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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인들이거나 부부일지 모르겠다. 사랑하고 난 후 삶은 서로 사랑의 순간을 잊고 난감해진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처 해감되지 않은 것처럼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 다음에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알것도 같고 그렇다고 돌이켜보면 뚜렷하게 모르겠다. 사과의 때를 놓친 탓이리라. 삶은 그렇게 떠밀려왔다. 그런 생을 되돌릴 수가 있을까?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려면 상상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또 얼마나 그것이 지속될까. 항상 그것이 문제다. 그렇게 삶은 빈 껍데기가 되어간다. 그러니 앞으로의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부부 간이라면 연인 간이라면 용서와 이해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이런 특수한 관계를 일반적인 관계로 치환한다면 영원히 답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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