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시가 스승이다/박용하 본문
시가 스승이다
박용하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최승자, 「사랑하는 손」),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베갯머리에 앉은 밤〔夜〕을 먹었다/시커멓게 무른 잎들이 돋아났다/끓어오르는 열처럼 죽은 피를 뱉던 겨울/그녀는 먼 곳으로 떠난다고 했다/이곳은 너무 추워/파란 입술로 중얼거리며/불 꺼진 방처럼 어두운 반원의 폐를 끌어안고/따뜻한 바람이 부는 남쪽으로/아주 간다고 했다”(이용임, 「결핵」), “얼음집의 문이 열리고/들판 위로 서리가 내리며/대지에 색채 없는 그림을 그린다./이렇게 보이리라-마지막 시신경이/파괴되는 날, 하늘은 고요하고/세상은 오직 흰빛이리니. 마치/알프스의/눈과 같이.”(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영원한망각은망각을모두구한다.”(이상, 「선에관한각서5」), “무는 우리의 영원한 망명의 장소다. 장소로부터의 망명이다.//신에게, 인간에게 매한가지로 냉담한 돌, 우리는 그 돌을 단단한 제 고독 속에 내버려두리라, 무를 감시하도록.”(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모두들 아는데… 그러나 빛이/폐병환자라는 건 모릅니다./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신비의 세계가 그들의 종착점이라는 것도…/그 신비의 세계가, 저 멀리서도,/정오가 죽음의 경계선을 지나가는 걸 구성진 노래로/알려주는 곱사등이라는 것도 모릅니다.//나는 신이/아픈 날 태어났습니다./아주 아픈 날.”(세사르 바예호, 「같은 이야기」), “한때 나였던 소년은 어디에 있을까./계속 내 안에 남아 있나, 아니면 떠나버렸나?//난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그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아니?//이렇게 헤어지고 말 것을 왜 우린/그 오랜 세월 함께 성장하며 보냈을까?//나의 유년 시절이 스러져갔을 때/왜 우리 둘은 죽지 않았을까?//그 영혼은 내게서 떠나갔는데/왜 해골은 나를 뒤쫓아 오는 걸까?”(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동쪽 바다의 조그만 섬 바닷가 백사장에서/나 울다 젖은 채로/게와 어울려 노네//뺨에 흐르는/눈물 닦지 않은 채/한 줌의 모래 움켜쥐어 보이던 사람 잊지 못하네”(이시카와 다쿠보쿠, 『한 줌의 모래』),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나는 그때/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갈대와 장풍의 붙드던 말도 잊지 않았다”(백석, 「북방에서」), “물새 발톱은 바다를 할퀴고/바다는 바람에 입김을 분다./여기 바다의 은총이 잠자고 있다.//흰돛(白帆)은 바다를 칼질하고/바다는 하늘을 간질러본다./여기 바다의 아량이 간직여 있다.//낡은 그물은 바다를 얽고/바다는 대륙을 푸른 보로 싼다./여기 바다의 음모가 서리어 있다.”(이육사, 「바다의 마음」), “새가 미치건 말건 나무는 관심없다. (…) 바늘 하나를 집어내려 하는 잠수부는 미친다.”(앙리 미쇼, 「단편들」),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온갖 적들과 함께/적들의 적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김수영, 「아픈 몸이」), “얼마나 이력해야 이 삶을 온통 이력할 수 있을까?//이 삶은 저지르자.”(신동옥,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네가 사는 방식이 곧, 세계다.”(비트겐슈타인), “천지불인天地不仁”(『노자』), “체로금풍體露金風”(『벽암록』), “불천노不遷怒”(『논어』), “나는 나의 말이다.”(봅 딜런), “분명 나는 종종 남을 해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더 사정없이 나 자신을 해부한다.”(루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요기 베라), “을미년(1595년) 8월27일(정묘) 맑았다. 군사 5,480명에게 음식을 먹였다.”(이순신, 『난중일기』), “수용소 생활에서…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잃을 것은 목줄이고 얻을 것은 이 세상이다. 만국의 개털들이여 연대하라.”(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원하건 원치 않건/우리의 유전자에는 정치적인 과거가,/우리의 피부에는 정치적인 색채가,/우리의 눈동자에는 정치적인 양상이 담겨 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대의 아이들」),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심보선, 「갈색 가방이 있던 역」), “7월10일(일요일) ⃫제목:우리 아빠 ⃫아빠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 우리 아빠/우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신 우리 아빠/세상에서 가장 멋진 우리 아빠/불쌍한 우리 아빠/평생 일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우리 아빠/왜 우리만 두고 가신 우리 아빠/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자꾸만 우리집에서/같이 밥을 먹고 같이 시골에 차타고 같이 장난치고/살아있는 것만 같다/아빠가 살아있으면 새끼 강아지도 봤을 텐데/아빠가 살아있으면 아빠가 좋아하는 맥주도 마시고/할아버지 할머니도 봤을 텐데 그리고 우리를 안아 주셨을 텐데…/너무너무 보고 싶은 우리 아빠/그리운 우리 아빠 *** 아빠 고생 많았어요./그리고 고마웠어요./좋은 곳에서 편히 쉬/세요. 그리고 거기서는/일하지 마세요./그리고 잘 지켜주세요./꼭 ㅠㅠ”(2016년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던 중 추락해 숨진 노동자의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쓴 일기와 장례식장에 붙여 놓은 포스트잇), “꽃잎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줄거늘”(두보, 「곡강曲江」),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정지용, 「유리창1」),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 버린 얇은 바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김경주, 「바늘의 무렵」), “그날 난간을 붙들고 있던 손이 사라져버린 것처럼/그리고 무엇인가 뭉텅 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반개는 반개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접시 위에 남아서 시간에 갈변되는 과일 조각은 사소한 흔적입니다/사과 반개에는 씨앗이 보입니다/쪼개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폭력적인 것입니다/씨앗은 죽은 사람의 홉뜬 눈동자처럼 보입니다/죽음이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삶은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살아 있는 사람에겐 눈도 심장도 이빨을 파고드는 치통도 기다림도 깜박이는 것입니다/반개는 반개의 상처입니다/반개는 반개가 두들기고 두들기는 가슴,/반개는 반개의 존재 증명, 잊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김행숙, 「반개」),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조지 오웰, 「교수형」), “동물들에게 혐오감을 느낄 때 어떤 사람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느낌은 혹시 접촉하면 그들이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보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자신 안에 뭔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동물과 흡사한 것이 있어 동물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의식, 그것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모든 혐오감은 원래 접촉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다. (…) 극히 번잡한 한 구역, 몇 년 동안 피해왔던 가로망이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그곳으로 이사 온 순간 단숨에 훤히 보이게 되었다. 마치 그의 집 창문에 서치라이트가 설치되어 있어 빛의 다발들로 주변 일대를 해부하는 것 같았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나는 다음 페이지, 그다음 페이지, 또 그다음 페이지를 읽었다. (…) 여행이 있었다, 항상 여행이 있었다. 모든 것은 여행이었다. (…) 그리하여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시선은 책의 말들로, 그리고 책의 말들은 나의 시선으로 변했다.”(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생업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하루 내내 유아기의 제가 업혀 있던 누이의 땀내 자욱하던 등/기억하기론 제 글쓰기의 처음은 누이의 그 쉰내 나던 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여림,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당신 소명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제 소명은, 그가 벽장 문 앞에 서서 대답했어요. 시인이 되는 거였습니다./‘였다’고요?/제가 알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죠. 그걸 알기까지 삼십 년이 걸렸네요. 그 전에는 카펫 장사를 했어요. 물론 현재의 소명도 시인이 되는 겁니다. (…) 한 편의 긴 시를 쓴 건가요?/아마 어떤 시인도 한 편 이상의 시를 쓸 순 없을 거예요. 평생 걸리는 일이죠. 어쩌면 본인은 짧은 시들을 여러 편 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들도 모두 긴 시 한 편의 일부에 불과해요.”(존 버거, 『A가 X에게』), “이따금 하릴없이 지쳐, 지구를 향해/남몰래 눈물을 흘려 보내면,/잠과는 원수진 독실篤實한 시인//단백석 조각처럼 무지개빛 어른대는/이 창백한 달의 눈물 손 안에 담아,/해의 눈길 미치지 않는 가슴 속에 간직한다.”(보들레르, 「달의 눈물」), “사랑하는 사람과 하듯이 시간에 말을 걸었고, 시간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얼굴이 있는 듯 한참을 쳐다보았고, 시간 또한 묘하게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몹시 외로워요. 이 놀라운 도시 한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요. 이 도시에서 내가 가진 것이라곤 플라타너스 잎밖에 없습니다.”(파울 첼란), “너는 어떠니. 도무지 시적인 데가 없다고 좌절을 하며 아직도 스타벅스에서 시를 쓰니. 너무 좋은 것은 너무 좋으니까 안된다며 여전히 피하고 지내니. 딸기를 먹으며 그 많은 딸기 씨가 씹힐 때마다 고슴도치 새끼를 삼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전히 괴로워하니.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 지난겨울 내가 만난 젊은이가, 아니 돌멩이가,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 나도 그 옆에서 돌멩이가 되었다. 우는 돌멩이 옆에 웃는 돌멩이이거나 외치는 돌멩이 옆에 미친 돌멩이 같은.”(김소연, 「i에게」), “저문 길을 걸으며/너를 생각했었다//아주 오래전 겨울/우리만 남았을 때/나는 네 여린 손을 잡고/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었다/무딘 세월은 흘러/아픔만 남았을 때/나는 내 침묵의 날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었다//나는 언제나/채워지지 않는 가슴으로/아주 쉬운 일도 어렵게 만들어/너를 울리고/하루에도 몇 번씩/너를 떠날 생각에/네가 나를 떠난 것도/나는 잊고 있었다”(조동진, <저문 길을 걸으며>), “항상 규칙적으로 마주치곤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일부였던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내일이면 나 또한 프라타 거리에서, 도라도레스 거리에서, 판케이루스 거리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일이면 나 또한, 생각하고 느끼는 이 영혼, 나에게는 우주 자체나 다름없는 나 자신도, 내일이면 이들 거리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 내가 한 모든 일, 내가 느낀 모든 것, 내가 산 모든 삶은,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를 매일 지나다니던 행인 하나가 줄어든 사건으로 요약되고 말 것이다.”(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그리고 나는 회한이야말로 문학의 근본 감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사랑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운명에 의해서, 또 한 번은 나에 의해서. 사랑했던 사람을 두 번 죽여본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있다. 마이나스들에게 온몸 찢어져 그 회한마저 찢기기 전에는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신형철, 「사랑의 두 번째 죽음」), “털 송이 은 송이/암양들이 눈 속으로 사라지고/병정들이 지나가건만 내겐 왜 없는가/내 것인 마음 하나 변하고/변하여 내 아직도 알지 못하는 그 마음//네 머리칼이 어디로 갈지 나는 몰라/거품 이는 바다처럼 곱슬거리는/네 머리칼이 어디로 갈지 나는 몰라/우리의 고백에서도 떨어져내리는/가을 잎 네 손이 어디로 갈지”(아폴리네르, 「마리」),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그때에 내 말이 “닞었노라”//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무척 그리다가 닞었노라”//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믿기지 않아서 닞었노라”//오늘도 어제도 아니 닞고/먼 훗날 그때에 “닞었노라””(김소월, 「먼 후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닞고 먼 훗날 그때에 닞는 몸과 말과 마음의 독립과 연대, 그게 시 아닐까.
박용하
1989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견자』 『한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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