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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 산을 넘는 여자 본문

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허연 / 산을 넘는 여자

바람분교장 2019. 2. 9. 16:24

산을 넘는 여자

      허연 



한 사람이 주저앉은 모습을 본다는 것. 비가 왔다는 것. 새벽 육교 밑이었다는 것. 내 피가 빗물에 쓸려 가는 걸 바라보며 내가 걸었다는 것. 내가 넘은 것이 아마도 산이었다는 것.

나는 돌아왔다. 죽지 않고 산을 넘는 여자를 보기 위해. 그 여자가 갇힌 채 발을 구르던 세상에 오래오래 떠돌기 위해.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있다. 울 줄도 내 목을 조일 줄도, 나를 용서할 줄도 아는 그 여자. 너무나 자폐적이고 미숙한 그 여자가 있다. 파장 무렵 녹슨 청동거울 앞에 앉은 여자. 아무리 봐도 통속은 아닌 그 여자.

겨울 아파트 단지의 병적인 정취가 어울리는 여자. 내가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없어도 아무것도 아닌 여자. 죽지 않은 여자. 지금도 걸어서 산을 넘는 여자.

나는 돌아왔다. 서른 개가 넘는 산을 넘어.


허연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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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이해하는 것은 한 세계를 통째로 다 이해하는 것이리라. 산은 넘고 넘어도 산이다. 산은 질문이다. 아무리 서른 개의 산을 넘어도 나를 넘어서는 그 여자를 나는 어쩌지 못한다. 나는 여자의 손바닥 안에 있는 데도 여자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뭐하는 자냐고, 도대체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거냐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질문 같은 산이다. (한승태)


허연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의 운명에서 인간의 운명으로 확장하는 사고의 흔적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