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황현산의 <잘 표현된 불행> 중에서 본문
“자의식은 사물에 대한 의식의 결과로 명백하게 인간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자아감은 필연적으로 그 감정을 느끼는 자가 불연속성 속에 갇혀 고립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이 고립은 객관적 불연속성이 용이한 정도에 비례하고, 연속성이 가능한 정도에 반비례하여,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상상할 수 있는 한계의 견고성과 고정성이 문제되는 것이지만, 자아감은 고립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중에서 17~18p
의식의 주체에게 육체는 우연하게 깃들게 된 허술한 집이며, 종기나 혹은 같은 존재의 잉여이다.
주체가 세계를 향해, 다른 존재를 향해 열린다는 것은 그 주체를 자기 안에 있으면서 자기 밖에 있는 낯선 자로-동일자이면서 타자로-만든다는 것과 같다.
랭보가 드므니에게 보내는 편지, 이른바 투시자의 편지 가운데 하나에서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을 통해 투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갖 형식의 사랑, 괴로움, 광기. 그는 스스로를 찾고, 자기 자신의 속의 모든 독을 다 써서 그 정수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자가 신념을 다하고, 초인적인 능력을 다해야 하는, 그가 무엇보다도 위대한 병자, 위대한 범죄자, 위대한 저주받은 자, -그리고 지고한 학자로 되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 - 그는 미지에 도달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또 이렇게 썼다. ”나는 타자니까요. 구리가 나팔이 되어 깨어난다면, 전혀 구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한테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사색의 개화를 참관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라보고 듣습니다. 나는 활을 한 번 튕깁니다. 교향악이 저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거나, 한달음에 무대로 올라갑 니다. 랭보에게 투시자의 기획은 객관적인 시를 쓰겠다는 야망의 표현이다. 투시자, 곧 시인이 되는 것은 모든 육체적인 감각의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착란을 통해서 가능한 일인데, 이 착란은 이치에 맞아야 한다. 다시말해서 객관적이어야 한다. 19p
이와 관련하여 구리라는 말은 구리가 된다. 구리라는 말은 벌써 나팔소리를 낸다. 나무라는 말은 나무가 되고, 때로는 바다가 된다. 나의 주체이면서 나무의 주체인 나는 또한 바다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무관하였던 일체의 사물과 사건에 꿰뚫린다.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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