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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제라늄의 도움을 받아/임승유

바람분교장 2023. 2. 2. 11:50

제라늄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감싸 쥐자 만들어지는 어둠

두 손은 잘못 없지만 

 

흘러내리는

 

리듬과는 상관없는 것

 

동네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있었다. 그 안에 주검이 있다 했다. 술 먹고 발을 헛디뎠다 했다. 설거지 통에 담겨 있는 식기류와

 

오후의 빛

 

이미지는 아니다

 

끔속에서 친구는 혼자 나왔다. 그때 못 봤던 거 보러 가자. 빛이 빛을 벗어나는 방법

 

얼굴이 얼굴을 벗어나는 방법

 

제라늄의 도움을 받아 빛으로 색깔을 만들었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신발마저도 벗지 못한 채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자식을 감싸 안고서 흉기에 찔려 죽은 여성, 찔러 죽인 남자는

 

남편이라는 사람. 가족을 떼어내자 색깔이 분명했다.

 

찢어 죽일 놈. 어디 가서 지가 혀를 깨물고 죽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걸까. 엄마는

 

남편 잡아 먹은 여자

 

옛날 사람들은 두려움도 없이 저런 말을 잘도 했다. 내 앞에서 했다면 그 말을 찢었을 것이다. 엄마 혼자서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란 사람이 너한테 가장 잘한 일은 일찍 죽어버린 거라고 말하던 엄마는 가장 잘 이해했다.

 

가장 이해 못한 건

 

마당을 가로지르는 빛

뛰어다니는 사람들

 

친구랑은 손잡고 걸었다. 마음만 먹으면 날 수도 있었는데 혹시 몰라서 마음은 색깔처럼 남겨두기로 했다. 

 

 

임승유 / 22년 겨울호 계간 <청색종이> 발표작 

 


먼저 제라늄을 생각해 보자. 가정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하얀 화분에 담겨 창가나 문 주변에 꽃피고 있을 제라늄 말이다. 독특한 향 때문에 해충이 잘 꼬이지 않는,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독하지만 슬픈 풍경이다. 시에 따르면 친구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화자의 얘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친구와 화자의 이야기가 꽃잎처럼 겹쳐있다. 겹쳐 있다는 건, 가족 내의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가 겹쳐 있는 것일 게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본다. 화자의 어머니는 이른 나이에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친구네이거나 이웃의 살인사건으로 동네사람의 반응은 갈라진다. 거기에 분명한 건 가족이라는 관계를 벗겨내면 명확한 살인이고 폭력인데,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이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가 아니라 어떻게 가족이 그러냐고 했는가 보다. 뒤집어서 어떻게 가족이 그러는가 싶은 경악이다.

가족 내의 폭력은,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가능한 것인가? 엄마와 달리 동네사람의 눈을 가린 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빛일 수도 있고, 두 눈을 가린 손일 수도 있다. 가족은 그것 때문에 더 많은 피를 흘린다. 점점 해체되어 가는 가족의 한 단면이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 자주 목격되는 신문 사회면 사건들이다. 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의 가족일 수도 있다. 제라늄 화분처럼 익숙하다는 것이 더 슬프다. (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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