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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죄와 벌 본문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사십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 시 전집 p222 중에서
시대가 지난 작가를 오늘날의 윤리 잣대로 평가하려 해서는 아니 되는가? 김수영의 <죄와 벌>이란 시가 오늘날의 관점, 아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마초의 작품으로 오해받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쓸 때의 시대적 맥락이 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희랍인 조르바>를 쓸 때의 시대적 맥락이 있다. 그리고 김수영이 <죄와 벌>을 쓸 때의 시대적 맥락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시대적 맥락이 아닌, 시의 제목과 내용이 갖는 긴장과 점프를 통해 김수영의 시적 정직성을 얘기하고자 한다. 작품의 내용과 제목 간의 맥락에 의해서 독자에게 벌 받을 각오로 쓴 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시의 내용은 시적화자가 아내를 우산대로 대로변에서 쓰러지도록 때렸다는 것이다. 화자는 행위 사실을 나열하고 범행의 현장이라고, 그것을 범죄기록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렇게 제목에 등장하는 죄는 성립된다. 그러면 벌을 누가 주는 것인가? 벌을 받을 사람은 누구겠는가? 시적화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독자에게 벌을 받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래서 제목이 <죄와 벌>이다. 죄의 내용은 있으나 벌의 내용은 없다. 그건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인론의 입장에서 좀 더 친절하게 시가 쓰인 배경을 알아보자. 시인 김수영은 아내와 둘째 아들을 데리고 페데리코 펠리니 영화 <길>을 보고 나왔다. 그리고 대로변에서 범행이 일어났다. 젤소미나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다른 남자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주인공 잠파노를 불쌍히 여겨 떠나지 못한다. 먹고살기 위해 살인도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잠파노는 죽어 마땅한 사람일지 모른다. 젤소미나는 잠파노에게 이용만 당하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떠난 건 잠파노였다.
영화를 보고 나온 김수영은 아내를 젤소미나로 만들어 버린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 살인을 한다고 하는데, 각오를 가진 사람은 누군가? 영화에서는 젤소미나로 보이는데, 김수영의 삶에서 그런 각오를 가질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도 부부간의 내밀한 사정이겠으나 영화를 보고 나오며 아내는 남편에게 뭔가의 소회를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무언가를 건드렸을지 모른다. 다 좋다 그런 것은 각자의 사정이라 해도, 대로변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아내를 쓰러지도록 팰만한 사정이라는 건 없다. 그럼에도 미친놈처럼 시인은 아내를 두들겨 팼고, 그것이 미안한 것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반성이 아니고, 남들이 그것도 자신을 아는 사람이 그런 범행의 현장을 목격했을까 걱정하는 인간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 고 전한다고 나는 보았다.
누가 벌을 주어야 하는가?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시인의 의도라면 시적화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의도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관점이더라도, 페미니즘의 관점이라도 훌륭하게 받아내고 있지 않은가. 시적화자는 욕을 먹어야 하고, 나아가 고소라도 당해야 한다. 여기에 김수영의 시적 정직함과 역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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