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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병원이 있는 거리/한승태

바람분교장 2021. 11. 4. 09:57

병원이 있는 거리

 

 

건축자재가 녹스는 공터를 지나

만화책을 든 소녀가 햇살에서 걸어 나온다

소녀의 이마에서 떨어지는 웃음소리가 간간이 튀어 오르고

나는 벽공 가득 내 발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공터를 지나면 아주 오래된 평화교회가 나오고

누구에게나 햇살과 복음을 던져주는 참새들

둥지를 튼 담쟁이넝쿨 속 병원은 환하다

 

의사는 느닷없이 문을 닫고 참새들은 분주히 퇴근한다

병원을 지나 강가에 이르면 먼 구름이 애써

중력을 버티고 있다

 

소녀는 힘껏 강물의 힘살을 열어젖히고

거미줄과 강아지풀과 탱탱하게 물먹은 바람이

죽은 사마귀와 송장메뚜기 그리고 개미들의 행진이

버려진 흑백 TV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가을에 진찰받으러 간다

 

 

시집 <바람분교>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첫 문장은 "나는 병든 인간이다”. 이 첫 문장은 번역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가 그 중 강하게 어필되었다. 어쨌든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니 말을 돌리자면, 인간은 병든 존재다. 유럽에서 이 말은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로부터 나왔지만,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오래 전 한 말이다. 인간이 괴롭고 병들고 늙는 것은 살며 욕망에 의해 병든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럽에서 이 말은 신체적 병듦이 아니라 정신적 병듦을 의미했다. 석가는 정신만이 아니라 모든 몸과 맘이 하나고 모든 것이 병들었다 진단한다. 병을 대하는 유럽 철학자와 석가는 달랐다. 유럽은 병으로 인식하자 정상인과 구분하고 차단하며 감금하였다. 석가는 인간은 희로애락을 통해 색의 세계에서 고통 받는 존재로 인간을 의식했고, 그래서 공의 세계로 초대했다.

하여튼 맘이든 몸이든 병든 인간이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주체는 괴롭고 외롭고 환해진다. 몸이 병든 인간이 괴롭고 외로워진다는 건 차별과 분별이 생긴다는 것이고 환해진다는 건 다른 세상을 보기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지켜보는 자에게는 괴롭고 외로워 보이지만 병든(미친) 자는 괴롭지 않다. 억압이 사라졌기에 시도 때도 없이 행복하다고 한다.

하여간 인간은 병들었다. 누구나 다 느끼는 건 아니지만,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병들었다고 느낀다. 병든 문명인이 병을 인식하면 병원이란 곳을 찾는다. 병든 짐승이 약초를 스스로 찾듯, 사실 병원과 약초는 곳곳에 있다. 근대 의료체계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자연은 인간이 균형을 잃는 순간 채찍을 가한다. 균형을 잡으라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건 자연 뿐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한 순간에 돌려는 놓는 건 자연 밖에 없다. 온 세상을 순식간에 바꿔놓기도 하는 자연에 인간은 계절별로 물든다.

늦가을 햇살 아래 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햇살의 웃음소리를 듣는 거다. 더 나아가 참새들의 요란스럽고 수런거리는 수다나 웃음소리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햇살의 웃음소리는 늘 새롭다. 종교처럼 찐득하고 음습한 여름을 지나온 나에게는 꼭 그렇다. 그 웃음소리에 지친 몸과 맘을 회복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햇살과 참새의 웃음에 나뭇잎이 환해지고 풀들이 환해지고 나도 환해지고 세상 모두가 환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화자는 자신과 세계가 동일하다는 정통적인 서정시의 화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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