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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박균수/땅 끝에서

바람분교장 2019. 11. 28. 15:32

땅 끝에서


아직도 너에게선 긴 긴
바람이 불고
꿈자리마다 쉼 없이 나부끼는
해초 같은 머리칼
눈감아 지나버린 그날의 네 손
밀물처럼 다시 잡았다
썰물처럼 놓으며
나는 더 이상
나를 죽이지 않기로 했다

아직 살아 파닥거리는 기억을 물고

날아가는 갈매기

고통의 지층을 파도에게 보이고 선

해안 절벽 바위 틈새엔 다시

잎 푸른 잡초가

한 줌 모래에 의지해 서고

바다와 하늘을 갈라놓은 금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상처 위에 덧난 사랑에
소용돌이 치지 않기로 했다



박균수, 시집 <적색거성>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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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라 할 것 없이 사는 내내 내가 딛고 선 곳이 땅 끝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까지 잘 버텨낸 게 신기하고 장했다. 수많은 배신을 당하면서도 새로 만나는 인연마다 의심을 할 수 없었다. 설령 그 믿음이 모래 한 줌 같더라도 내가 살기 위해 믿어야 했다. 그러니 또 얼마나 막막하고 억울했을 것인가. 그리고 얼마가 지났던 것인가. 얼마나 울었던 것인가. 소용돌이 치지 않기로 했다니. 스스로 하지 않으면 휩쓸리지 않을 힘을 가졌다는 것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 욕망이 사라졌단 것인지.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는 것만 말해두자.  한승태


그날은 한칼에 베어진 하늘이었고 바다였다

너와 나는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는 고유한 색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쪽에는 나의 하늘이 저쪽에는 너의 바다가 있었다

오직 하늘과 바다 그 갈라진 사이만이 시야에 가득했고

그 사이를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차고 있었다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 한승태 <지옥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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