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들판의 트레일러 / 김개미 본문
들판의 트레일러 / 김개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나는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들판을 가지게 되겠지
풀이 마르는 냄새가 옷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스밀 거야
당신과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냄새야
당신은 트레일러에서 빛을 끄고 녹슬어가다
하루에 한 번씩 새로운 연장으로 태어날 거야
당신은 끽끽거리는 트레일러를 흔들며 요리를 하고
고장난 줄도 모르는 나를 오전 내내 수리해
나는 차돌 같은 당신의 희고 큰 치아 밑에서
펴지고 잘라지고 조여지면서 점점 쓸모 있어져
당신이 들판에 살면 어떨까 생각하곤 해
독초와 뱀과 바위가 많았으면 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던 곳도 좋아
그런 곳일수록 진귀한 풀과 나무와 꽃이 가득하니까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 좋아하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망쳐버리기 일쑤니까
나는 매일 저녁 심장을 갈가리 찢는 노을을 구경하고
밤이면 부엉이 눈 밑에서 당신을 소재로 시를 쓸 거야
어느 날 혼자 보는 별이 더 아름답다 생각되면
내 부츠를 풀밭에 던져
돌이 별이 될 만큼 멀리 떠나가 줄게
- <시인동네>, 2020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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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 담긴 이 시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시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좋다. 소박하지만 인간의 심장을 잘 보존하고 있다. 좋은 시는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시를 쓰게 한다. 그런 시가 최고의 시다. 이 시는 좋은 시다. _한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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