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11월/한승태 본문
11월
어깨 기운 나무 전신주
가물거리다 흐릿하고 고요하다 깊어진다
햇살은 노드리듯 날비처럼 나리다
골짜기마다 고이고 고여서
날개를 접은 까마귀 하나 눈이 멀었다
이승의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자
볕바른 도사리나 마른 삭정이처럼 오래
마르고 있다
이깔나무 해 바른 등성이마다
털갈이하는 짐승들의 숨소리 더 깊어지고
푸섶길마다 햇살은 실없이 건너뛴다
타버린 나무둥치 아래로
쑥부쟁이나 구절초 감국 뭐 이런 것들도
어서 추워져서 눈물을 말리고 싶다는 듯
시베리아 찬바람을 불러들인다
한 사내가 밀고 나갔다
난기류에 꺾이고 밀고 밀려서는
더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아홉사리재
배고픈 젖꼭지마냥 쪼글쪼글해지고
주름 깊은 아스팔트 위에 두 발이 푹푹 빠져
깃털 빠진 한 생生을 토해내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생을 지나는 구름에게는
- 한승태 시집 『바람분교』 p.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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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사이 한승태 시집 『바람분교』를 천천히 읽었다. 시인의 본색이 완연한 시집이다.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레토릭이 돌올하다는 얘기다. 나는 이처럼 완미한 ‘스타일’을 갖춘 시집을 좋아한다. 그런데 변주나 변개의 욕망으로 조급해하다가 어설픈 포즈만으로 채워진 시집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상기한 「11월」에는 시간이나 풍경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한 자만이 읽어낼 수 있는 세계가 들어 있다. 자의식을 탈각시킨 묘사의 정밀함이 서정을 보지하면서도 서사적 필연성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시인에 의해 발견된 세계가 비죽이 드러내고 있는 정연한 섭리는 “노드리듯” “날비” “도사리” “삭정이” “푸섶길” “이깔나무” 같은 고유어의 감각에 의해 다시 한 번 환기된다. 내가 이 시편뿐 아니라 시집 전체에서 백석의 정서와 정지용의 리듬을 발견했다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시집 날개에 적힌 프로필을 보면 시인은 자신의 출생지를 “강원도 내린천 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깊은 곳에서 단련되었을 호흡과 시선을 시인은 “깃털 빠진 생”처럼 “토해내기도 하”면서 참으로 잘 건사해냈다. '시간'을 키워드로 시편의 내력을 분석한 황정산의 해설도 어지간히 깊고 그윽하다. (김도언_소설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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