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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한명희/두 번 쓸쓸한 전화

바람분교장 2018. 9. 18. 09:45

두 번 쓸쓸한 전화

 

 

 

시 안 써도 좋으니까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조카의 첫돌 알리는

동생의 전화다

 

내 우울이, 내 칩거가, 내 불면이

어찌 시 때문이겠는가

 

자꾸만 뽀족뽀족해지는 나를 어쩔 수 없고

일어서자 일어서자 하면서도 자꾸만 주저앉는 나를 어쩔 수 없는데

 

 

미혼,

실업,

버스운전사에게 내어버린 신경질,

세 번이나 연기한 약속,

냉장고 속 썩어가는 김치,

오후 다섯 시의 두통,

햇살이 드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쓰여진 일기장,

이 모든 것이 어찌 시 때문만이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

한번도 당당히 시인이라고 말해보지 못한 시

그 시, 때문이겠는가

 

 

 

 

이름이 그 남자를 밀고 간다

 

 

 

 

그 남자는 키가 크다

그 남자는 신발도 크다

그 남자의 이름은 신발과 키를 합한 것보다 더 크다

 

전에는 신발이 그 남자를 밀고 갔다

신발이 없으면 그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이름이 그 남자를 밀고 간다

큰 이름이 큰 신발을 신은 큰 남자를 밀고 간다 잘도 간다

 

 

 

 

다시 쓰는 일기

 

 

 

 

물살이 빨라지는 강가에서 소리쳤네

나는 바보가 아니란 말이에욧!

 

그때부터 풍경들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네

우리의 새끼손가락이나 입술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둥둥둥 떠내려가고 있었지

 

꼭 한 번 바보여도 좋았을 그때

나는 여전히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부전패

 

 

 

사방이 링인 적이 있었다

싸우고 싶지 않지만 싸움이 되는 때가 있었다

싸움인 줄 물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피가 터져 있는 때도 있었다

 

나는 이제

훅도 제법 날릴 줄 알게 되었고

맷집도 이만하면 좋아졌는데

나를 자꾸만 내려오라고

게임은 이미 끝났다고

 

 

 

 

가장 무서운 것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무섭다

(가령, 개미보다는 송충이 같은 것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부드러운 것은 더 무섭다

(뱀의 경우가 그렇다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부드러우면서 형체가 없는 것은 더욱 더 무섭다

(안개,

특히 밤안개.....

 

형체가 없으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는 것 그런 것들은 모두 무섭다.

 

천천히 부드럽게 말하는 얼굴 그러면서도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그런 얼굴은 무섭다 정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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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 뒤돌아 회피할 수없다는 두려움이 신화를 만든다. 그건 조직의 신화고 권위의 신화다. 그 속에 돌멩이가 아니고 로봇이 아닌 살덩이를 가진 심장이, 출렁이는 마음이 바다에 이르러도 절벽에 가 머리를 부딪는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연약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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