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한명희 /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 본문
이방인
똑바로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마흔 살 나는 전형 엉뚱한 곳에 와 있었다
엉뚱한 곳에서 이방인의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통역해주지 않았다
왈가왈부
나는 거기서 한참 멀리 걸어왔는데, 너는 어제의 나와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는 거기서도 한참 더 멀리 왔는데, 너는 일 주일 전의 나를 붙들고,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고, 살이 좀 쪄야겠다고, 나는 그 동안에도 또 걸어왔는데, 너는 한 달 전의 나를 불러 세우곤,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나는 거기도 지나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는 일 년 전의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잘 지내느냐고, 언제 한번 만나자고, 나는 여기를 지나 저기까지 갔는데, 너는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붙들고 또 뭐라고 뭐라고....
아무려나
내가 싫어하는 가수도
가요 톱 텐의 순위에 오르고
연말이면 가수왕이 된다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도
정당 당수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해외 순방을 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승진을 하고 휘트니스 클럽 회원이 되고
주말이면 외식을 한다
아무려나
내가 싫어하는 꽃도
향기 잘만 퍼지고 유행이 되고
날로날로 번창한다
아무려나
아무려나
내가 이렇게 싫어하는 시집도
재판을 찍고 삼판 사판 십판을 찍고
끝내 베스트셀러가 된다
내가 이렇게 처절히 싫어한다고 해도
높은 자리
자기도 모르게
여러 사람을 밟고 올라선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자리가
그렇게 높을 수가 없다
자기도 모르게
여러 사람을 깔아뭉개고 올라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자리가
그렇게 푹신할 수가 없다
높은 자리
자기도 모르게
더 높은 자리를 꿈꾸게 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 그렇게 연연할 이유가 없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내려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 말은 듣지 않겠다
그런 말은 듣지 않겠다
내 몸을 컴컴하게 하는 말
내 머리를 하얗게 하는 말
그런 말은 듣지 않겠다
내 몸을 출렁이게 하는 말
귀를 무시로 드나드는 말, 말, 말,
차라리 내 귀에 독약을 부어라
이런 말도 듣지 않겠다
살갗을 기어다니는 말
전등이 한꺼번에 수천 개 켜지는 말
소문의 난장
어둠의 터널
내 귀
내 귀에 차라리 뱀 떼를 풀어라
불후의 명작
원래는 이런 그림을 그리려고 했었다
집이 한 채 있고
느티나무 세그루가 그 집을 지키고 있는 그림
바람은 불어도 좋고
안 불어도 좋고
구름은 흘러가도 좋고
안 흘러가도 좋고
집이 한 채
느티나무가 세 그루
그림은 오래도록 완성되지 않았다
아무리 기둥을 세워도 지붕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물을 주어도 나무는 자라지 않았다
붓질을 할수록 그림은 초현실적으로 되었다
구름 위로 떠돌아다니는 집
집 속에 갇힌 나무들
집을 끌고 가는 바람
이제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되어버렸다
오뚝이
세게
더 세게
나를 쳐라
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유목의 이유
무엇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이번에는 또 무엇을 견딜 수 없어 뛰쳐나온 것일까
병원을 옮기고 옮기고 또 옮기는 동안
병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던 것
점집을 옮기고 옮기고 옮기고 또 옮기는 동안
미래는 점점 더 불투명해졌던 것
이번에는 아니야
절대 아니야
확신하면 할수록
자신감은 점점 더 줄어들었던 것
그런 줄 뻔히 알면서
나는 또 무엇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무엇을 견딜 수 없어 뛰쳐나온 것일까
뛰쳐나와 어디로 가겠다는 것일까
어디까지 가보겠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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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말은 심장을 꿰뚫는다. 그러기에 시의 말은 칼로 비유되곤 한다. 대개 우리 삶에서 겪게되는 부조리에 대항하여 시인은 칼을 휘두른다. 그래서 피가 나고 분노한다. 때론 시인의 분노에 같이 분노하고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검이 타인에게 향할 때 분노하고 자신에게 향할 때 쾌감을 느낀다. 어떤 상황은 자신과 상황을 개관할 수 있게 알레고리로 보여준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사는가 알고 싶다면 이 시들은 답할 것이다.
한명희의 시는 어떤 현상이나 사태의 전체를 보려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떤 현상이나 사태의 감각적 느낌에 주목하기보다 전체를 통찰하려는 태도이다. 괸찰자의 시점인데 이런 시점은 사회는 물론 자기 내부에도 같은 관점을 유지한다. 그래서 부분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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