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이덕규_ 공범 본문
공범
이덕규
집 한 채가 전소했다
방화였다고 한다 현장 검증에서 범인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여자네 집 현관 귀퉁이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십년을 기다리다
까맣게 타죽은 소화기를 공범으로 지목했다고 한다
시인동네 10월호 중에서 이덕규 <공범> 전문
--------------------------------
범인은 지금도 차갑고 더러운 감방에서 속을 태우고 있을까? 하지만 그의 공범인 소화기도 이제는 버려졌을 것인가? 불교에 의하면 모든 마음은 버려진다. 모든 사랑의 마음은 변하게 마련이다. 영원불멸을 꿈꾸지만 그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꿈꾸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타오르는 마음은 이전도 이후도 없다. 당장의 눈 앞만 있을 뿐이며, 그것을 유예시키는 것은 만족감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순간이면서 영원이어야 한다.
소화기는 불을 끄는 도구이다. 소화기는 누구의 마음을 꺼야했을까. 누구는 끄고 누구는 끄지 못한 소화기가 무슨 잘못이겠냐마는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끄지 못한 자의 비애라 치자. 그래서 사랑은 괴로움으로 끝나는가보다. 집 한 채, 몸 하나 모두 전소하고 다시 세우기를 또 몇 번을 해야 이 생은 다 갈 것인가? 특히 이 가을 공범을 잘 두어야 할일이다.
(한승태)
'혼잣말 > 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가/이소희 (0) | 2018.01.04 |
---|---|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 (0) | 2017.10.31 |
보들레르 (0) | 2017.10.28 |
최계선_ 고라니 (0) | 2017.10.27 |
안국역_민왕기 (0) | 2017.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