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있을 뻔한 이야기/이현승 본문
유령들
낮에 켜진 전등처럼 우리는 있으나마나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파리채 앞에 앉은 파리의 심정으로
우리는 점점 더 희박해진다.
부채감이 우리의 존재감이다.
따귀를 때리러 오는 손바닥 쪽으로
이상하게도 볼이 이끌린다.
파리를 발견한 파리채처럼 집요하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메시지가 온다
미션-임파서블
40대 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게 뭘까? 서점에 가봐야겠다.
삶은 여전히 지불유예인데,
우리는 살면서 한 가지 역할놀이만 한다.
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채무자
우리는 아직 올라가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내려가라고 하네요.
40대가 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30대가 되기 전에 했어야 할 일들이다
귀신들
하긴 딴 사람은 없는데
잃은 사람만 있는 판돈 같은 이야기,
혹은 빌린 사람은 없는데
빌려준 사람만 있는 신체포기각서 같은 이야기.
“내 다리 내놔” 하면서 따라오던 귀신은
어쩌다 다리를 간수하지 못했을까?
하긴 때린 사람은 없는데
언제나 아픈 사람만 있는 폭력적인 이야기,
끈덕지게 따라붙는 귀신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눈코입도 없이 자꾸만 따라다니는 달걀귀신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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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필요없는 시다. 그렇다고 가벼운 시도 아니다. 어느새 인간으로서의 삶은 사라지고 부채가 존재인 유령의 삶이 대신하는 요즘이다. 국민 한 사람당 부채가 몇 천만을 넘어선지 오래다. 자본은 늘 온화한 웃음을 짓고, 힐링을 얘기하며 긍정적으로 일만하란다. 일만 해봤자, 부채의 늪에서 벗나긴 이 생에서 글렀다. '있을 뻔한 이야기'가 아닌 현재에 내 삶이 그렇다는 것, 그런 것을 깨달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보다. 나만은 아니겠지, 열심히 일하면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겠지하는 환상, 귀신들은 즐비하다. 하층민의 64% 이상이 정치적 보수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저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이데올로기다. 그 이데올로기가 지켜내는 보수사회가 자본을 영속시킨다. 80년대 어떤 시인은 가난한데 빚마저 없으면 외롭다고 했던가, 그런 낭만의 시대는 갔다. 빚이 빚을 만들고, 가난이 가난을 만들어 계급으로 영속화시키는 시대다. 빌어먹을 시대다.
시인,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시집으로 『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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