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분교_우리는 조금씩 떠나가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마을 본문
존재하지 않는 마을
김성규
처녀의 시체가 호두나무에서 내려진다
눈 위에 눕혀진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빛난다
이듬해부터 가지가 찢어지도록 호두가 열린다
나일론 줄에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뱃속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죽어간 것을 사내들은 알고 있다
노인들은 손바닥에 검은 물이 들 때까지
마당에 앉아 호두껍질을 벗긴다
어두워지면 검은 손이 나타난단다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이 손바닥을 바라본다
빈 하늘을 쓸어내리는 바람소리
호두알처럼 영근 아이들은
밤마다 계집애들 이야기를 한다
다 익은 처녀들을 찾아다니는 수염 검은 아이들
폭설로 하늘이 하얗게 반짝이는 날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호두나무가 쓰러진다
참새 발자국만한 눈송이
지상에 웅크린 지붕을 밟고 가는 날
아무도 나무 위의 세상을 묻지 않는다
김성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
'혼잣말 > 바람분교장이 전하는 엽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 (0) | 2013.05.27 |
---|---|
시인 (0) | 2013.05.27 |
있을 뻔한 이야기/이현승 (0) | 2013.01.22 |
구월의 이틀/류시화 (0) | 2012.12.10 |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에르 (0) | 2012.12.04 |